항목 ID | GC02002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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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三問- |
영어의미역 | Seongsammunjae Pass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종익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서 성삼문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91년에 논산문화원에서 출간한 『놀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성삼문은 10여 세에 이미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 1453년(세종 17)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고부터 벼슬을 하기 시작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의 야욕을 품고 거사할 때 성삼문은 우사간으로 있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마침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으니 그가 곧 세조이다. 이때 성삼문은 예방승지로 있으면서 옥새를 들여오라는 명에 따라야 했다. 상서원에 가서 옥새를 꺼내던 그는 손을 사시나무 떨 듯 하면서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지 2년이 되던 해에 명나라 사신 윤봉이 우리나라에 와 있었다. 세조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하여 창덕궁 광연전에서 연회를 베풀기로 하였다. 성삼문 등은 이때 상왕(단종)의 복귀를 위해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거사를 며칠 앞두고 김질이 배반하여 세조에게 밀고, 성삼문의 계획이 탄로 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성삼문 등 사육신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였다.
세조는 “그들의 시신을 쪼개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버리라.”고 명하였다. 그때 성삼문의 시신을 지고 가던 인부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까지 와서는 “에잇. 무겁고 귀찮은데 아무 데나 버릴까?” 하고 혼잣말을 하자, 지게에 얹혀 있던 성삼문 시신이, “아무 데나 묻어라.” 하였다. 인부는 무서워서 벌벌 떨며 지게를 내팽개치고 도망갔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성삼문의 묘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묘소 근처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 이 소나무는 성삼문의 충의를 대변하듯 굳건하게 자랐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충성스런 뜻이 담긴 나무란 뜻으로 사송(思松)이라 불렀다. 또 나무가 위치한 곳이 고개인 까닭으로 그 일대를 사송치(思松峙)라 부르고, 성삼문의 시신 일부가 묻혀 있는 고개란 뜻으로 성삼문재라 불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성삼문재」의 주요 모티프는 ‘성삼문의 왕위복원 도모’와 ‘성삼문의 죽음’이다. 왕위복원을 도모한 성삼문이 죽음을 당했는데, 그 시신이 묻혀 있는 고개를 성삼문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왕위복원담이자 지명유래담이다. 「성삼문재」는 성삼문의 왕위복원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의 왕위복원 도모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의 주검은 분리되어 여러 곳으로 나누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 묻히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신체 일부로 인한 무덤 생성이 근거가 되어 그 앞의 고개를 성삼문재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무덤가에 자란 나무에 근거하여 무덤 주변을 사송치(思松峙)라 부른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