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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71
한자 趙威鳳
이칭/별칭 자우(子雨), 녹문(鹿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21년연표보기 - 조위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2년 - 조위봉 사마시 합격
몰년 시기/일시 1675년연표보기 - 조위봉 사망
출생지 조위봉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묘소|단소 조위봉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양
대표 관직 공조좌랑, 헌납·사간·보덕·지평, 교리, 능주현감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문(鹿門). 할아버지는 조익남(趙翼男)이고, 아버지는 우참찬 조경(趙絅)이다. 외할아버지는 이조 판서 김찬(金贊)이다. 완양군(完陽君)에 추봉된 이명웅(李命雄)의 사위이다.

[활동 사항]

조위봉(趙威鳳)[1621~1675]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1642년(인조 20) 사마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장릉 참봉을 거쳐 사복시 주부를 지냈다. 1650년(효종 1) 아버지 조경과 함께 건의한 상소가 시의(時議)에 중하게 거스름을 받아 폐고(廢錮)되어 사류(士類)가 애석하게 여겼다. 1660년(현종 1) 공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이 되었다. 1667년 정언을 거쳐 사서·수찬·헌납·사간·보덕·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71년 대사헌 장선징(張善瀓), 장령 박지(朴贄)과 함께 상차하여 “성상의 뜻을 세우고 실지의 덕을 닦아 크게 경계하고 크게 진작하는 것으로써 하늘에 응답하는 의리라 하고, 쓸데없는 병사를 도태하여 헛된 비용을 절약하고 내지 못한 세금을 감면해 주어 인심을 복종시키는 것이 시국을 구제하는 일”이라 하였다. 또 이전 각 도의 각색 군보(軍保)와 노비의 제반 신역(身役)과 관조(官糶)의 포납(逋納) 등을 일체 탕척하여 전부 면제하고 이어서 교지를 내려 위로하는 은혜의 뜻을 선포하기를 청하였다.

또 신정(申晸)·이계(李稽)·김만중(金萬重) 등과 함께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및 삼남 지방의 진정 득실(賑政得朱)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分遣)되었다. 이때 그는 충청도 어사로 “목천 현감 황휘(黃暉)는 유임한 뒤로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았고, 평택 현감 이행하(李行夏)는 진휼의 정사에 마음을 다하고 자봉(自奉)은 간소하게 하였으며, 전 감사 이홍연(李弘淵)은 집이 청주에 있는데 왕래하면서 폐단을 끼쳤다.”는 서계(書啓)를 올렸다.

하지만 “암행어사의 사찰은 임무가 막중하므로, 이미 암행이라 하였으면 참으로 누설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교리 조위봉(趙威鳳)은 탐문할 때 친구의 집마다 죽 들러 심지어 누구는 포상할 만하고 누구는 파직할 만하다고 말하였고, 그 말이 퍼지자 혹 수령이 지레 동요할까 염려하여 다시 친척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여 안심하도록 권하기도 하는 등 처사가 매우 무리하였고, 추생(抽栍)에 든 고을도 죄다 살피지 못한 곳이 있어 직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이 있으니 파직하라.”는 지평 윤가적(尹嘉績)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73년(현종 14) 교리로 있을 때 영릉(英陵) 관리가 부실함을 지적하여 능의 봉심관(奉審官)들을 탄핵·파면시켰으며, 이어 검토관으로 경연에 나가 기민의 구제와 부패한 이도(吏道)의 확립을 건의하는 등 남인의 입장에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1674년(현종 15) 능주 현감으로 나아갔다가 지병으로 돌아왔다. 홍문관 전한(典翰), 직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못하다가 1675년(숙종 1) 홍문관에서 숙직을 하다 병이 들어 임금이 자주 어의를 보내 주어 문병을 하기도 하였다. 효성이 깊어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자 손가락에서 피를 흘려 바치는 정성을 보였고, 약을 구하기 위해 인근 고을을 두루 다녀 이를 칭송하는 감호(鑑湖) 양만고(楊萬古)의 시가 전한다.

[학문과 저술]

의론과 생각에는 자기 마음을 열어 성의껏 인도하는 것이 매우 많았고, 진언하여 권계하는 책임을 맡아서는 일에 따라서 바로잡았다는 평을 들었다. 청빈하였으며 항상 정의를 주장하였으므로 권신(權臣)의 뜻에 거슬려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문학으로 소일하였다. 글씨에 능하여 이름이 높았다. 저술로 『동문초(東文抄)』가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녹문산 함바위에 있다., 비문은 아들 조구주(趙九疇)가 짓고 임정(任珽)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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