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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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燕岐郡信託統治贊成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상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5년 12월 29일 - 건국준비위원회 연기지부가 연기군반탁투쟁위원회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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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45년 12월 30일 - 좌익 중심의 신탁통치찬성운동 전개 |
성격 | 사회운동 |
관련 인물/단체 | 맹의섭|김정헌|이모|안재홍|양정석|최봉국|이찬환|박용덕 |
[정의]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연기군 좌익 세력 중심의 운동.
[개설]
연합국은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을 연쇄적으로 개최하였음에도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전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하여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한 합의는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간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국 임시민주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동안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정서에 3개 국이 합의하였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하여졌다. 이에 연기군의 좌익 세력은 처음에 반탁운동을 동조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갑자기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다.
연기군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23일부터 일찍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위원장은 맹의섭, 부위원장은 김정헌이었다. 맹의섭은 조선일보 연기 지국장이었고, 중앙의 부위원장이었던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안재홍이었는데 즉시 지부로 승인 받아 ‘연기건국준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치안유지 등의 활동을 실시하였다.
[역사적 배경]
9월 중순부터 좌익 계열의 위원들이 중앙으로부터의 내왕이 빈번해져 ‘인민위원회’의 소집이 끈질기게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본래는 8월 14일 일본이 항복한 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가 송진우에게 치안권을 전임하고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하려다 거절당하였다. 여운형이 위원장으로 내정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집단 가담하여 수선을 피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항하여 김병노, 조병옥, 백관수, 원세훈, 나용균 등이 8월 28일 조선민족당을 발기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에서는 9월 초 남로당 박헌영이 주축이 되자 안재홍이 탈퇴하였다. 이에 건국준비위원회 산하는 인민위원회로 변조되어 좌익 집단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연기군 읍공회당에서 인민위원회가 소집되어 불상사가 예상되었다. 방청석에서 김필수가 의결권은 없지만 발언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통에 좌익 측이 불가하다고 하자 의자를 던지는 등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서 산회되었다.
신탁통치안이 보도된 1945년 12월 28일 김구와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합이 열리고 이튿날에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12월 29일에는 임시정부 요인 신익희(申翼熙)가 온양온천에서 조치원으로 와 특별 강연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조치원 읍민들이 신익희의 강연을 듣기 위하여 조치원교동초등학교 교정에 모여들었다. 그때 ‘소련 측의 주장을 따라 우리나라를 5개국 관리 하에 최고 5개년에 걸치는 신탁통치를 거쳐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자’라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 내용을 동아일보가 한국 최초로 보도하였다. 그리고 신익희가 급히 상경하면서 조치원 방문이 중단되었다.
이에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조치원읍 공회당에 모여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단체로 ‘연기군반탁투쟁위원회’를 조직한 후 반탁 전보를 발송하였는데 이는 서울보다 하루 빠른 시점이었다. 위원장은 맹의섭, 부위원장은 김정헌과 이모(李某)였다. 위원으로는 양정석, 최봉국, 이찬환, 박용덕 외 공산계열 인물들이 있었다.
[경과]
연기군반탁투쟁위원회는 시내 각처에 ‘신탁통치 반대’ 벽보를 신속히 붙였다. 이튿날 오전 부위원장 이모와 그에 동조하는 위원이 사표를 제출하였다. 공산 계열 위원들이 찬탁통지를 받은 모양인지 하룻밤이 지나고 ‘신탁통치 반대’라는 벽보 아래에 ‘반대’라는 두 글자를 써 놓았다. 언뜻 보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반대한다’하여 즉 ‘반대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뜻이어서 반탁위원회 결성에 참가한 이모 등의 공산계열 인사들은 하룻밤 사이에 노선을 변경하였다.
12월 31일 오후에 인민위원회의 간부 전원이 소집되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병행할 수 없음을 각자 설파하고 인민위원회를 해산하기로 제창하였다. 모두 찬성하여 즉석에서 해산을 선언하는 동시에 각 진영은 수 개소에 벽보로 성명하였다. 차후에 인민위원회를 부활시키려는 공산 계열의 타협안과 위협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군정책임자 존 하지 중장의 대공 유화정책으로 조치원의 우익 세력은 곤란함이 적지 않았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31일 신익희 내무부장 명의로 국자(國字) 1호와 2호 포고문을 발표하여 미군정의 모든 한인 관리와 경찰들이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선포했다. 이를 통하여 당시의 통치 권력이던 미군정을 부정하고 임시정부가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포고문 발표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김구와 임시정부에 강력히 경고하기도 하였다.
[결과]
1945년 신탁통치찬성운동은 해방 정국 최대의 분수령 가운데 하나였다. 이 운동을 계기로 연기군 좌익세력과 우익세력 간 대결 구도가 확고하게 형성되었고, 이후 해방 공간의 정치 구도가 결정되었다. 좌익 세력이 민주주의 인민전선을 결성하여 자신들만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좌우 대립 구도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의의와 평가]
신탁통치찬성운동에 대한 거부감은 우익 세력이 연기군 지역에서 확고한 자기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합국의 승전에 따른 해방이라는 조건 하에서 미국의 영향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신탁통치찬성운동은 복잡한 국제정치적 맥락에 대응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노출된 운동이었다. 결국 이 운동은 미국과 소련의 협조보다 대립을 강화하는 성격이 짙었기에 한반도의 분단을 수습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던 운동으로 평가가 저하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