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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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大洙義兵將功績碑 |
이칭/별칭 | 의병장 임대수 공적비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길 10-49[나성동 59-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경순 |
건립 시기/일시 | 1999년 08월 15일 - 임대수의병장 공적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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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2012년 - 임대수의병장 공적비 이전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82년 2월 12일 - 임대수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911년 6월 - 임대수 사망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 임대수 건국포장 추서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임대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 |
현 소재지 | 나성동 독락정 역사공원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길 10-49 |
원소재지 | 생가 입구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담리 표석동 |
성격 | 비 |
관련 인물 | 임대수 |
소유자 | 세종특별자치시 |
관리자 | 세종특별자치시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에 있는 의병장 임대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개설]
임대수는 옛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담리 출신이다. 일명 학수(學洙)·호경(浩京)으로 불리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일본 제국주의의 한민족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간섭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세종 지역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충청남도 일대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의병 50명을 인솔하여 일본군 은진 헌병분파소를 습격하고 총기·탄약과 서류 등을 탈취하였으며, 구금되어 있던 애국지사 여러 명을 구출하는 등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리역은 1907년 임대수 의병부대가 일제의 침탈 상징인 경부철로 보급선의 무력화를 시도하기 위하여 전투를 치른 곳이다. 역사(驛舍)[역으로 쓰는 건물] 시설을 불태워 보급과 통신을 무력화시켰다.
이 외에도 1907년 8월부터 1908년 2월까지 청양, 당진, 보령, 공주 등 충청남도 일원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1911년 6월 공주 의당 태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끝내 전사하자 마을사람들이 동지 6명과 함께 하천변에 가매장하여 국권 수복을 기다렸다.
[건립 경위]
임대수의병장 공적비는 태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한 의병장 임대수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위치]
임대수의병장 공적비는 옛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담리 표석동에 건립되어 있었다.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이후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에 있는 나성동독락정역사공원 내로 이전하였다.
[현황]
정부에서는 임대수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9년 8월 15일 광복절에 ‘임대수의병장 공적비’가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담리 표석동에 건립되고, 2004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2019년 현재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인하여 나성동독락정역사공원 내로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