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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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宜寧南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윤희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729년(영조 5) - 남필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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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753~1762년 - 남필복 입향 추정 |
본관 | 의령남씨 본관 - 경상남도 의령군 |
입향지 | 의령남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성강리 |
세거|집성지 | 의령남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성강리 |
묘소|세장지 | 남이웅 묘소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봉곡리 12-3 |
묘소|세장지 | 금남 남산영당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남산길 51-4[성강리 193-4] |
성씨 시조 | 남민 |
입향 시조 | 남필복 |
[정의]
남민을 시조로 하고 남필복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남민(南敏)을 시조로 하는 의령남씨는 남이웅(南以雄)[1575~1648]의 후손들이 1700년대 중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성강리에 정착한 이래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연원]
의령남씨 시조 남민은 당나라 사람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이다. 신라에 귀화하여 경덕왕 때 남씨 성을 하사받았다.
의령남씨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영양(英陽), 의령, 고성(固城)으로 나뉘어 관적(貫籍)하였다.
의령남씨는 충렬왕 때 통헌대부(通憲大夫)와 추밀원직부사(樞密院直副使)를 지낸 남군보(南君甫)를 1세조로 삼아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어오고 있다.
[입향 경위]
의령남씨 금남면 성강리의 입향조는 남필복(南必復)[1729~?]으로, 조선 시대 공신 남이웅의 6세손이다. 입향 시기는 남필복의 호구단자(戶口單子)[조선시대에 호주가 가족 사항을 적어 지방 수령에게 신고하던 서류]와 준호구 6건을 통하여 확인되는데 1753년~1762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남이웅이 죽은 후 당시 서울에 세거하던 의령남씨는 남이웅의 묘를 공주 반포면으로 예장(禮葬)[예식을 갖추어 치르는 장례]하게 되었고, 이후 이웃한 성강리에 후손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현황]
금남면 성강리의 의령남씨는 1970년대 6가구, 2019년 5월 3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기군의 의령남씨는 1985년에는 60가구 266명, 2000년에는 92가구 274명이다.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의 의령남씨는 707명으로 남자 350명, 여자 357명이다.
[관련 유적]
금남면 성강리에 남이웅의 영정을 봉안한 금남 남산영당이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고, 영당 뒤쪽에는 남이웅의 묘소가 있다.
또한 남이웅의 부인 남평조씨(南平曺氏)[1574~1645]가 쓴 『남평조씨 병자일기』가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