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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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利川徐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하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윤희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812년(순조 12) - 서치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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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861년(철종 12) - 서치운 사망 |
입향 시기/일시 | 1800년대 후반 - 서치운 생몰년으로 입향 시기 추정 |
본관 | 이천서씨 본관 - 경기도 이천시 |
입향지 | 이천서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하봉리 |
세거|집성지 | 이천서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하봉리 |
묘소|세장지 | 이천서씨 재실 박약재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
성씨 시조 | 서신일 |
입향 시조 | 서치운 |
[정의]
서신일을 시조로 하고 서치운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는 이천서씨 문목공파(文穆公派) 후손들이 1800년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하봉리에 입향한 이래 현재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연원]
이천서씨는 신라 효공왕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을 시조로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서필(徐弼)·서희(徐熙)·서눌(徐訥) 3대가 재상(宰相)이 되었고, 이후 가문이 번성하여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이천서씨는 서씨의 대종(大宗)으로, 달성(達成)·장성(長城)·연산(連山)·남양(南陽)·부여(扶餘)·대구(大丘) 등 20여 개로 분파되었다.
[입향 경위]
장군면 하봉리 이천서씨는 서기(徐起)[1523~1591]를 파조로 하는 문목공파 후손 서치운(徐致運)[1812~1861]을 입향조로 삼고 있다.
이천서씨 문목공파의 세거지인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를 떠나 주변 지역인 연기면 수산리, 장군면 산학리·은용리 등지를 거쳐 하봉리에 정착하였다. 뚜렷한 입향 사유는 알 수 없다.
현재 하봉리에는 서기의 13~14세손이 살고 있다.
[현황]
장군면 하봉리 이천서씨는 1960년대 하봉리 전체 100가구 중 30가구, 2019년 5월에는 20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기군의 이천서씨는 1985년 31가구 133명, 2000년 37가구 141명이다.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의 이천서씨는 658명으로 남자 355명, 여자 303명이다.
[관련 유적]
장군면 하봉리 이천서씨 문목공파 문중은 매년 음력 10월 15일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재실(齋室) 박약재(博約齋)에서 종원(宗員) 100여 명이 모여 향사(享祀)[제사를 지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