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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702
한자 安光祚
영어공식명칭 An Gwangj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안광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안광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됨
출생지 안광조 출생지 -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월하리
성격 의병|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세종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안광조(安光祚)[1884~1920]는 채응언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의병가이다.

[가계]

1919년에 안광조가 36세인 점으로 미루어 1884년 무렵에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출신 가문이나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활동 사항]

안광조는 1907년 헤이그 특사 의거와 광무황제 강제 퇴위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이 격화되어 갈 때 양서 지방의 채응언(蔡應彦)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항일전을 벌였다.

채응언 의병부대는 양서 지방의 대표적인 의진(義陣)[의병의 군진]으로, 1914년까지 끈질기게 항일전을 전개한 국내 최후의 의병부대로 평가되고 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행을 계기로 대한제국을 병탄(竝呑)[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1907년 7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내정(內政)[국내정치]을 완전히 침탈하였으며, 이어 8월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으로 전환하게 됨으로써 의병 전쟁이 격화될 수 있었다.

육군 보병 부교(副校) 채응언도 이때 의병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이진룡(李鎭龍) 의병장 휘하의 부장(部將)이 되어 양서 지방과 관동 지방 일대를 무대로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다. 안광조도 의진에 투신한 것으로 인정된다.

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安平)의 순사 주재소와 수안(遂安)의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 헌병을 사살하였고, 함경남도의 마전도 순사 주재소를 급습하여 많은 무기를 빼앗았다.

채응언 의병은 1910년 국치를 전후하여 이진룡이 해외로 망명한 뒤에는 김진묵(金溱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300~400명 규모의 채응언 의병은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한반도 중북부 내륙 지방을 전전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분투적인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13년 6월 3일에는 황해도의 대동리 소재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였고, 일본군 수비대를 불태워 일본군 여러 명을 부상케 하였다. 그리고 오승태(吳承泰) 의병과 합세하여 선암(仙岩)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평안남도 성천군 옥정리(玉井里) 산기슭에 근거지를 두고 부유한 한인에게 항일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군자금 조달에 협조하도록 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채응언 의병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일제 군경과 친일 매국노 등이 처단당하자 일제는 채응언을 체포하고자 채응언 의병을 탄압하기 위한 특별 부대를 출동시켰으며, 의병장 채응언을 체포하기 위하여 현상금을 거는 등 혈안이 되었다.

안광조는 영웅적인 활약을 보인 채응언 의병의 일원으로서 대일 항전을 끝까지 전개하였다. 안광조는 1915년 7월 채응언 의병장이 체포된 뒤에도 한동안 무장 투쟁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의병 활동으로 인하여 일제의 추적을 받아오던 끝에 1919년에 체포되어 1919년 12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7월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안광조의 공적을 기리어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敍)[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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