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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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全州李氏旌閭 |
이칭/별칭 | 열녀 최지철 처 전주이씨 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로 76[봉산리 산54-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이전 시기/일시 | 1974년 - 열녀 전주이씨 정려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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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열녀 전주이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0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전주이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0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전주이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0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열녀 전주이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로 76[봉산리 산54-8] |
원소재지 | 열녀 전주이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대로변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강화최씨 문중 |
관리자 | 강화최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0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에 있는 최지철의 처 전주이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열녀 전주이씨 정려는 최지철(崔之喆)[1759~1778]의 처 전주이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전주이씨[1759~1779]는 이대형(李大亨)의 딸로, 이미 1769년(영조 45) 11세의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한 효녀였다.
1777년(정조 1) 19세 때 강화최씨 23세손인 최지철에게 출가하였으나 시집살이 1년 후에 남편이 병으로 숨을 거두자 따라 죽을 것을 결심하고 7일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러나 유복자라도 있을지 몰라 몸을 조심하며 다섯 달을 지냈으나 그래도 태기가 없자 다락에 올라가 목을 메고 자결하였다.
[위치]
조치원읍에서 전동면 방향으로 국도 제1호를 타고 약 1㎞ 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세종여자고등학교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고, 세종여자고등학교 입구에서 다시 1㎞ 정도 가면 봉산리 중뜸마을이 나온다. 열녀 전주이씨 정려는 중뜸마을 입구 북쪽의 길가에 있다.
[변천]
1822년 홍석주가 찬한 정명(旌銘)에 의하면 마을 선비들이 관찰사에게 여러 번 소를 올려 1784년(정조 8)에 특명으로 정려를 받았다고 한다. 원래 조치원읍 봉산리 대로변에 있었으나 1974년 도로 개설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형태]
정면·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리고 양 측면의 박공 밑에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시멘트 바닥에 화강암 8각 고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4면은 홍살을 돌렸다.
[현황]
정려 내부 중앙 상단부에는 열녀 전주이씨의 명정현판[烈女 學生崔之喆妻 孺人全州李氏之閭 崇禎紀元後三甲辰 九月 日 命旌]이 걸려 있다. 또한 정려 내에는 1832년 2월 대제학 홍석주가 지은 ‘강화최공지철처이씨행장’을 담아 2005년 3월 13일 방손(傍孫)[방계(傍系)에 속하는 혈족의 자손] 최병규(崔秉奎)를 중심으로 비석을 세워 두었다.
정려 옆에는 1981년에 세운 ‘강화최문건기제현비’가 있다. 열녀 전주이씨 정려는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전주이씨는 남편에 대한 절의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효심이 강하여 조선시대 여자의 덕목을 고루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다. 전주이씨 정려를 통하여 조선시대 여성들의 절의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