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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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彦陽金氏旌閭 |
이칭/별칭 | 열녀 장응헌 처 언양김씨 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청연로 622-8[송용리 99-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793년 - 열녀 언양김씨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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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71년 - 열녀 언양김씨 정려 이전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44년 - 열녀 언양김씨 정려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5년 - 열녀 언양김씨 정려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열녀 언양김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1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언양김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1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언양김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1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열녀 언양김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청연로 622-8[송용리 99-3] |
원소재지 | 열녀 언양김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결성장씨 문중 |
관리자 | 결성장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1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에 있는 장응헌의 처 언양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열녀 언양김씨 정려는 결성장씨 장응헌(張應軒)[1609~?]의 처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언양김씨는 첨정(僉正) 김징(金澄)의 딸로, 16세에 장응헌에게 출가하여 시아버지와 남편을 정성껏 섬겼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이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피란하여 암혈에 숨어 있었지만 적병이 들이닥쳐 두 아이를 죽이고 김씨를 붙잡아 말에 태웠다. 말에 태워진 언양김씨는 말에서 떨어지면서 은장도로 자결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에는 언양김씨가 이러한 열행으로 인조조에 명정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충청도읍지』, 『호서읍지』, 『연기현읍지』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환여승람』에는 김씨가 달아나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 이를 본 청나라 장수가 언양김씨의 정절을 의롭게 생각하여 표목을 세워 주었다고 하여 기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위치]
연동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00m 정도 가면 송용리(松龍里) 송룡마을 혹은 나븐말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나온다. 열녀 언양김씨 정려는 송룡마을에 있는 동면 파출소에서 소로를 따라 10m 정도에 있는 아미산 남쪽 기슭인 불가령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열녀 언양김씨 정려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에게 끌려가기보다 자결을 택함으로써 절개를 지킨 열녀 언양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1793년(정조 17)에 건립한 것이다.
1638년(인조 16)에 충청도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명정을 받았으나 명정 후 바로 정려가 건립되지 못하고 150여 년이 지난 1793년(정조 17)에 연기현감의 건의로 나라에서 건립 자재를 지원받아 송용리 나븐말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844년(현종 10)에 류관승(柳觀升)이 지은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65년에 후손 장세진·장경순 등이 중심이 되어 정려를 중수하였고, 1971년에 도로를 넓히면서 도로 위쪽인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기와를 새로 올리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도로에서 정려가 있는 구릉지로 오르기 위하여 시멘트 계단을 설치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화강석재를 가공한 8각 고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을 하고 있고, 창방 위에는 1개의 화반대공과 2개의 태극문을 올려놓았다. 정려의 좌우 측면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시설하였다. 정려 주변은 철재로 둘러쌓았다. 현재까지 잘 보수되어 관리되고 있다.
[현황]
정려 내부 중앙에는 1638년(인조 16)에 명정을 받은 열부 언양김씨의 정려임을 나타내는 명정현판[烈婦 贈承訓郞戶曹左郞張應幹妻彦陽金氏之閭 己卯十月 日, 196×39㎝]이 걸려 있다.
뒤쪽에는 1793년(정조 17)에 진사 조정경(趙鼎慶)이 지은 ‘烈婦金氏旌閭記’[72×52㎝]와 1809년(순조 9) 현감 이희기(李羲耆)가 지은 ‘彦陽金氏烈女記’[85×44㎝]가 나란히 걸려 있다.
왼쪽으로는 1844년(헌종 10)에 현감 류관승(柳觀升)이 짓고 7세손 장준상(張駿相)이 쓴 ‘古佐郞張公之妻金氏旌閭重修記’[93×43㎝]와 1965년에 10세손 장세진(張世鎭)이 짓고 11세손 장경순(張敬淳)이 쓴 ‘先祖妣旌閭重修記’[69×34㎝]가 나란히 걸려 있다.
오른쪽 하단에는 1971년에 10세손 장영진(張榮鎭)이 지은 ‘旌閭移轉記’[45.5×30㎝]가 걸려 있다.
정려기를 비롯한 중수기 현판들이 부분적으로 낡아 일부 내용은 파악하기가 어렵다.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열녀 언양김씨 정려는 병자호란에 열행을 행한 언양김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이다. 열녀로서 명정을 받았지만 바로 건립되지 못한 사례에 해당한다. 명정 후 150여 년 만에 건립되었음에도 후손들이 언양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열녀기를 짓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모범적인 보존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