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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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杞溪兪氏旌閭 |
이칭/별칭 | 열부 신이초 처 기계유씨 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상석곡길 108[석곡리 235-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96년 - 열녀 기계유씨 정려 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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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1년 - 열녀 기계유씨 정려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08년 - 열녀 기계유씨 정려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열녀 기계유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33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기계유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3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기계유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33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열녀 기계유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상석곡길 108[석곡리 235-3] |
원소재지 | 열녀 기계유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상석곡길 108[석곡리 235-3]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거창신씨 문중 |
관리자 | 거창신씨 문중[신완성]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3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에 있는 신이초의 처 기계유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열녀 기계유씨 정려는 거창신씨 신이초(愼爾初)[1663~1719] 처 기계유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기계유씨[?~1719]는 시남(市南) 유계(兪棨)[1607~1664]의 종손녀이다. 유계는 조선 중기 호서지역의 대표적인 서인 노론계 인물로, 사계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 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저명 가문의 후예로 태어난 기계유씨는 어려서부터 부덕을 익혔으며, 나이가 차자 석곡리의 거창신씨 22세손 신이초에게 출가하였다.
『호서읍지』, 『전의현읍지』, 『조선환여승람』 등에 따르면 기계유씨는 시부모 봉양과 남편 섬기기를 깍듯이 한 효부였다. 남편이 병으로 죽자 자식들의 만류에도 식음을 전폐하였고, 이후 7일 만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
[위치]
전동면 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석곡리 상석곡 마을의 북서쪽에 열녀 기계유씨 정려가 있다.
[변천]
기계유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전의현 지역 사계들이 전의현과 충청감영에 열행을 상서(上書)[아랫사람이 윗사람 또는 신하가 임금에게 글을 올리거나 올린 글]하여 1729년(영조 5)에 열녀 명정을 받았다. 『연기지』와 『거창신씨세보(居昌愼氏世譜)』에는 이 지역에 파견된 암행어사의 계문(啓聞)[조선 시대 때 신하가 글로써 임금에게 아뢰던 일]으로 정려를 받았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1729년 정려 명정을 받은 후 곧바로 정려가 세워졌을 것이지만 당시의 창건 기록이나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 정확한 사실은 확인하기 어렵다.
창건 이후 세월이 오래 지나 건물이 퇴락하자 1896년에 중수하였고, 다시 퇴락하자 1971년에 문중 협의를 거쳐 군비 보조로 재차 중수하였다. 그 후 2008년에 다시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정려 구조는 정면 1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겹처마로 되어 있다. 화강석재를 가공하여 만든 8각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올리고, 4면에는 홍살을 돌렸다.
바닥은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정려 주변에 보호시설은 없으나 잔디를 깔아 정갈하게 정비하였다.
[현황]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부에는 기계유씨의 명정현판[220×29㎝]이 게재되어 있다. 명정현판에는 ‘故通德郞愼爾初妻 烈女恭人杞溪兪氏之門 崇禎紀元後 己酉 命旌’이라고 쓰여 있다.
벽면 뒤편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여러 개의 중수기와 그때 지은 시가 담긴 현판 5기가 게재되어 있다. 오른쪽 벽면에는 1971년 중수 때 9세손 신공범(愼孔範)이 지은 행적시[51×23㎝]가 게재되어 있다.
명정현판 뒤로는 1896년 7세손 신종하(愼宗夏)가 지은 중수기[70×28㎝]와 1971년 9세손 신혁범(愼赫範)이 지은 중수기[62×23㎝]가 걸려 있다.
왼쪽 벽면에는 1971년 안동인 권처상(權處祥)이 지은 행적시와 2008년 11세손 학교장 신용대(愼鏞大)가 지은 중수기[43×27㎝]가 걸려 있다.
열녀 기계유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열녀 포장에 관한 기록에 차이가 있어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기계유씨는 충청도 저명 가문의 후예로서 병들어 죽은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지어미의 본분이라 생각하여 자결하였으니 후세의 본보기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