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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훈·김만석 순국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705
한자 高仕訓-金萬石殉國地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213-2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한금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3월 4일연표보기 - 의병장 고사훈, 의병 김만석 순국
현 소재지 고사훈·김만석 순국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213-2 일대지도보기
원소재지 고사훈·김만석 순국지 - 대정군 우면 안성리
성격 유적|의병순국지
관련 인물 고사훈|김만석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개항기 의병장 고사훈과 의병 김만석이 순국한 장소.

[개설]

1909년 2월 25일[음력 2월 6일] 고사훈[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승천’으로 개명함]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인관[의병으로 나서면서 이름을 ‘병생’으로 개명함]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회합을 도모하였다. 당시 제주의병의 창의자는 제주군 중면 광양동 거주자인 고사훈 외 8명과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 거주자 한영근 등 모두 10명이었다.

또한 의병장에는 고사훈이중심을 추대하였는데, 창의 당일 고사훈·김만석·김재·양남석·조인관 등은 대정군으로 가서 모병을 시작하고, 김석윤·양만평·이중심·한영근 등은 의병을 모았다가 고사훈이 거사하는 것을 기다려 가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고사훈은 먼저 영락리에서 100여명[당시 제주경찰서 구보희등차(久保喜藤次) 순사부장의 복명서에는 20명으로 기재되어 있음], 신평리에서 100여명을 규합하고, 대정성의 북문 밖에 위치하고 있던 마을에서 수십 명의 의병을 규합하였다. 이러한 모병활동이 대정군 우면 영락리와 신평리에서부터 시작하게 된 까닭은 바로 대정 지역이 예부터 제주 지역 민란의 발생지라는 전통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모병이 용이할 것이라고 생각한 고사훈이 중심이 되어 규합된 의병대는 제주경찰서 대정주재소의 예측과 달리 대정성을 습격하지 않고 2월 28일 대정군의 중면 광청리에 집결하였다. 이들 의병대는 3월 1일 두개의 해안선과 중산간도로를 따라 제주성을 향하여 진격하면서 각 마을의 의병들을 규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주경찰서 대정주재소는 3월 1일에 광청리 민가를 습격하여 고사훈김만석을 체포하였다. 3월 2일 대정에 도착한 순사부장 구보희등차(久保喜藤次)는 고사훈에게 항복할 것을 회유하였는데, 이에 대해 고사훈이 말하기를 “지난해 윤원구 군수와 이야기할 때 나라의 사정이 너희로 하여금 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에 처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구하고자 함은 국민된 도리다. 지금 나는 의(義)를 위하여 나선 이상 구차하게 너희들의 감언이설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오직 죽음으로써 국은에 보답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구보희등차가 “만일 당신이 회심만 하면 곧 상부에 보고하여 고관으로 천거하겠다”고 회유했다. 고사훈은 “옛날 박제상이 너희 왜나라에 인질로 간 신라의 왕자를 탈출시킬 목적으로 갔을 때 왜왕이 만일 왜국의 신하가 되어준다면 중록으로 상을 주겠노라고 하자,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는 될 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고 싶지 않으며, 신라의 형장은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너희 나라에서 불태워 죽음을 당하였다. 이게 우리나라 백성의 나라에 대한 마음이다. 어찌 구차하게 너의 감언이설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느냐”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렇게 대정주재소에서 고사훈김만석을 심문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한 채 1909년 3월 4일 오전 이들을 서귀포주재소로 이송(移送)할 때였다. 유치중인 고사훈김만석이 포승을 절단하고 도주하다가 그들의 뒤를 추적하던 경찰이 대정성 동문 밖 400~500미터 지점에 이르렀음에도 체포할 여력이 되지 않자, 대정주재소 소속 순사 강순사에 의하여 사살되어 순국하였다.

[위치]

지금의 고사훈·김만석 순국지는 덕수3교차로와 안성교차로 중간지점에 있으며 근처에 김만석 묘가 있다. 「폭도에 관한 편책」[『제경비발(濟警秘發)』 제36호의 5]에 따르면, “유치중인 적괴수 고승천, 적도 김만석 2명이 포승을 끊고 돌연 간수하는 순사를 들이받아 쓰러뜨리고 도주하였으므로 각원은 빨리 추적하여 대정 동문 밖 수정(數町)에 이르러도 적의 도주가 빨라서 체포할 가망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위 두 사람을 사살하고 시체는 그곳 원야(原野)에 가매장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황]

현재 고사훈·김만석 순국지는 왕복 4차선 아스콘포장 도로로 변해있어,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고사훈김만석이 순국하자 고사훈의 형과 동생이 고사훈의 시신을 수습하여 제주면 영평 동남쪽 두곡(杜谷)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김만석은 가까운 인척이 없어 가매장된 채로 있다가 지난 1977년 남제주군수 현치방에 의하여 의병의 묘로 안장되었다.

[의의와 평가]

현재 이곳은 4차선 도로로 어디에도 옛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이처럼 도로변에 마을 표지석은 크게 들어서 있으면서도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순국한 선인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표지석이나 기념 조형물로 이곳에 대한 기억을 되새길 수 있다면 역사 교육 현장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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