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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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康文昊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금순 |
[정의]
3·1운동 때 군산 지역 만세 운동에 참여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 항일 운동가.
[개설]
3·1운동 당시 군산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기독교계 학교인 영명학교와 구암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태생인 강문호(康文昊)는 기독교 신자로서 같은 제주 출신인 강규언(姜圭彦)과 함께 군산영명학교에 다니던 중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고, 재판정에서도 방청석의 시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에 유공이 인정되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활동 사항]
강문호는 1914년 중문에서 최대현 전도인에 의해 동향의 친구 강규언과 함께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당시 교회에서 두 신도를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 있는 기독교계 사립 영명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는 영명학교에 다니던 중, 학교 기숙사에서 영명학교 교사 및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7천여 장을 비밀히 만들고 태극기를 준비하여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5일 구암리에서 군산경찰서에 이르는 도중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 현장에서는 체포되지 않았으나,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 관련자들의 재판정에서 강문호는 영명학교 4학년생으로서 동향의 동지인 강규언의 재판 과정을 보기 위하여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이때, 30여 명의 만세 운동 주동자들이 간수에게 끌려 재판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과 학우들, 특히 동향의 강규언이 수갑으로 묶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방청석에서 맨 먼저 벌떡 일어서서 모자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많은 방청객들이 순식간에 호응하여 재판장은 만세 소리로 가득찼다.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2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하자 법정 소란의 죄를 더하여 1919년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1부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강문호는 창씨개명 및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고오베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목사로 서품되고 경남 거창, 전남 무안, 서귀포, 한림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은 강목사의 인품을 듣고 제주도지사의 취임을 종용했으나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일제 강점기 한림신사가 있던 자리에 한림교회를 크게 지어 일제 잔재 청산에 앞장섰으며 제주 지역 기독교 활동에 매진하다 1986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강문호는 항일 운동 대한 공훈으로 1980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본인에게 전수하고, 또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또 한림교회 신도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어 1991년 7월 12일 그의 5주기 추도일에 공적비를 한림교회의 뜰에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