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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901
한자 姜文錫
이칭/별칭 김달삼(金達三),강문도(姜文道)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동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 9월 11일연표보기 - 강문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0년 4월 - 강문석 조선인에 대한 일제에 수탈에 저항하여 동아통항조합 결성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월 22일 - 강문석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계(全協系) 노동조합 운동으로 기소, 보석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2월 - 강문석 조봉암과 함께 상해에서 ‘한국인 반제동맹’ 결성하고 선전부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4년 5월 30일 - 강문석 중국 공산당 상해 한국인 책임자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 선고 받음
출생지 강문석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 지도보기
성격 항일독립운동가|노동운동가|사회주의 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전협대판화학 노동조합 상임위원|중국 상해 한국인 반제동맹 선전부장|중국공산당 상해 한국인지부 책임자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 항일 독립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 .

[개설]

강문석(姜文錫)은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하여 일제수탈에 저항했고, 일본에서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중국공산당 상해 한국인지부 책임자를 맡는 등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 활동을 지도하다 수차례 투옥되었다.

[가계]

강문석은 1906년 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 안성리 1661번지[추사적거지, 그의 증조부가 추사적거지의 주인이었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강기용(姜基龍), 할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증조부는 강도순(姜道淳)이다.

[활동 사항]

강문석은 1928년 4월경 도쿄(東京)로 건너가 전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가입하여 화학노조 상임위원이 되는 등 노동조합 운동을 하면서 점차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30년 4월에는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수탈에 저항하여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하였다. 이후 전국 오사카화학[大阪化學] 노동조합의 상임위원이 되고, 동맹파업 선동 등 노동운동을 하다 오사카 학교(鶴橋)경찰서에 검거되었으나 보석으로 출소하였다.

1931년 9월에 상해로 건너가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동시에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하고 조선혁명의 임무를 수행할 목적으로 조봉암 등과 ‘상해한인 반제동맹’ 결성하고 선전부장이 되어 중심적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강문석은 중국공산당 한국인지부에 입당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조선공산주의자에 대한 일본 관헌의 탄압에 일대 항의를 일으키자”는 선전물과 각종 팜플렛을 작성하는 등 조봉암과 함께 거물급 조선인 공산주의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강문석은 1932년 10월 상해에서 검거되어 국내에 투옥되었다가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한 사실이 드러나 일본으로 압송되었고, 1934년 5월에 오사카공소원[大阪控訴院]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귀국하여 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을 이끌면서 투옥되기도 하였고 해방후에는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에는 남로당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55년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강문석은 4.3사건의 무장대 총책임자인 김달삼[본명: 이승진]의 장인이기도 한데, 김달삼(金達三)이라는 이름은 강문석이 항일운동기간중 가명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강문석의 가명(假名)을 사위가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

[저술 및 작품]

“조선공산주의자에 대한 일본 관헌의 탄압에 일대 항의를 일으키자”는 선전물과 각종 팜플렛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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