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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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景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찬식 |
출생 시기/일시 | 1908년 - 김경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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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7년 5월 16일 - 김경옥 정의면 청년회 씨름대회 사건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1년 - 김경옥 사망 |
출생지 | 김경옥 출생지 - 성산면 난산리 555번지 |
활동지 | 고성리 씨름장 항쟁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352번지 |
성격 | 항일 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정의면 청년회 씨름 대회 사건에서 활동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의면[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청년회 씨름 대회 사건에 참여한 항일 운동가.
[가계]
본관은 경주. 1908년 성산면 난산리 555번지에서 김학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27년 5월 16일 정의면 중앙청년회가 주최한 ‘정의면 체육 대회’가 개최되어 고성리에 있는 모래판에서 씨름 대회가 벌어졌다. 마침 청어잡이 원양 어업을 하던 일본인 선박이 성산포 포구에 정박 중이었는데 그 선원들이 씨름 구경을 하다가, 그중에 한명이 지역 주민과 대전을 요청하여 대전이 이루어졌는데 선원이 패하였다. 이에 씨름에서 패한 일본 선박의 선원이 판정에 불복하여 재대전을 요구하였다. 심판을 보던 박규언이 대회 규칙을 들어 거절하자, 일본 선원이 심판의 빰을 때려 폭행하였다.
정의면 청년들이 항의하자, 일본인 선원들까지 합세한 2백여 명이 죽봉·각목 등을 동원하여 싸움을 걸어 왔으며 결국 지역 청년 5백여 명이 싸움에 가담하여 일본인 선박 선원들과의 패싸움으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선원 김명선과 일본인 1명이 사망하고, 성산포 주민 4명과 일본인 1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제 당국은 이 사건을 '성산포 소요 및 상해치사 사건'이라고 규정하여 전남경찰부의 병력을 출동시켜 임시 검사국을 설치하였고, 1927년 5월 23일까지 혐의자 혹은 선동자라고 하여 92명을 체포, 그 중에 52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일본 선원들에 대한 처벌은 전혀 없었다.
김경옥(金景玉)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7년 12월 16일 광주지법에서 상해 치사 및 상해 혐의 죄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아 미결 기간[체포된 날부터 형이 확정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김경옥은 1951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