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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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敎育 |
분야 | 문화·교육/교육,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임승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 제주 군수로 부임한 윤원구가 보통학교를 총물당에 설립하였다가 제주목 객사였던 영주관으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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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8년 - 사립 의신학교 설립·개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8년 - 정의 군수 장용견이 서귀포 성읍 마을에 의명학교 설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8년 - 대정군수 김종하가 안성 마을에 한일학교 설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9년 - 의명학교는 공립 정의보통학교로 개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0년 - 의신학교는 공립제주농업학교로 개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1년 - 한일학교는 공립대정보통학교로 개편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 대한제국 말에서 해방 이전까지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개설]
근대 교육은 근대 국가의 성립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교육으로 주로 계몽 사조를 기초로 나타난 계몽주의 교육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교육은 근대를 어떻게 시기 구분하느냐에 따라 다소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본격적인 개항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1945년 해방까지 각종 근대식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육을 의미한다.
1880년대부터 1945년 8·15 광복까지 우리 나라의 근대 교육 기간 가운데 특히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될 때까지를 개화기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조선은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봉건적인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로 옮겨 가기 시작한 때였다. 이 개화기는 봉건 사회가 해체되고 자생적인 민족 발전의 과정이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으로 좌절되던 때로서, 근대 교육이 촉발되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역사적 전환기의 조선 말기의 교육은 기존 봉건 사회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에서 점차 교육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들이 부각되는 근대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 근대 교육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또한 제주의 근대 교육은 출륙을 통해 제주 지식인들이 직접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고, 유배인들의 영향과 제주 지식인들의 문제 의식 수준이 제고되는 등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여 종래의 폐쇄적․봉건적 틀에서 벗어나 근대 교육으로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개화기]
제주도 근대 교육의 개안은 당시 조선 전역에 걸쳐 일어난 교육 구국 운동을 통해 더욱 촉발되었다. 특히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제의 의도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던 1895년경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자주 독립 민족 계몽 운동을 통한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일환으로 전국에 3-4천 여개가 넘는 사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주 근대 교육의 기원은 통상 현 제주 북 초등학교의 전신인 제주 공립 보통학교와 사립 의신 학교를 개설한 1907년부터로 보고 있다.
당시 서귀포 중문면 지역은 대정현에 소속되었던 지역이어서 대정향교 권역으로 문화가 형성되었고, 서귀면 지역은 정의현에 소속된 지역이어서 정의향교 권역으로 교육․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00년대 들어서면서 급변하는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새로운 교육 형태가 요구되었고, 뜻 있는 선각자에 의해 사숙(私塾)을 개설되거나 근대 학교의 설립이 이루어졌다.
1907년 제주 군수 윤원구에 의해 4년제 초등 교육 기관인 제주 공립 보통학교가 개설 운영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정의 군수 장용견이 1908년 정의군 군청 소재지인 서귀포 성읍리의 충신당(忠信堂)에 의명 학교를, 대정 군수 김종하는 대정군 군청 소재지인 안성리의 향사당(鄕舍堂)에 한일 학교를 각각 개설하였다.
이들 학교의 교육은 종래의 서당 교육이 향교 교육에서 탈피․신식 교육으로의 전환이자, 비록 사립 학교였지만 군청에서 관리하는 군립(郡立) 성격의 학교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후 제주시의 의신 학교는 1910년 공립 제주 농업 학교로, 의명 학교는 1909년 공립 정의 보통학교로, 한일 학교는 1911년 공립 대정 보통학교로 승격·개편되었다.
그리고 1908년 대정군 중문리 1699번지 ‘못동산’에 4년제 신식 학교인 개성 학교가 개설되었다. 당시 중문리 출신의 유림 이재교가 세워, 이기환 등을 교사로 초빙․운영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젊은 재사 10여 명을 선발하여 선진지 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으나, 일제의 간섭과 규제로 활동이 정체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1) 일본 거류민의 교육
1910년 일제는 통감 정치를 총독 정치로 바꾸고 헌병 경찰을 통한 무단 통치를 감행함으로써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병합하였다. 이 총독 정치와 함께 교육을 통해 식민지민을 순화시키고 내국인과 동화시키는 정책을 병행하게 되는데, 1911년 8월에 제1차 조선 교육령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강권에 의해 지방 행정이 변화하고, 조선의 고유문화가 침탈당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으로 제주에 오는 유이민들이 날로 증가하여 191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집단 주거지까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곤궁한 유이민들이 상권과 어권을 독점하고 제주의 산지항, 추자의 대서리, 성산포, 모슬포, 서귀포 등지에 집단 주거지를 형성하였다.
특히 당시 서귀포 지역은 비교적 한산한 어촌이었던 곳이었으나 일본의 거류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행정·교통·교육·상업의 중심지로 크게 변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거류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겪게 된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자녀교육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거류민들로서 교육 지원 단체인 학교 조합을 만들어 일본인 학교 설립을 추진하게 되어, 1917년 10월에 일본 거류민 학교인 서귀 남 공립 심상소학교가 개교하였다. 이어 1919년에 성산포 공립 심상소학교를 비롯하여, 1920년에는 추자도 공립 심상소학교 등 5개교가 각각 개설되었다.
2) 한국인의 초등 교육
1917년을 기점으로 일본 거류민 학교가 서귀포에 설립된 반면 한국인을 위한 학교는 개설되지 않아 지역 주민들로부터 많은 불만이 야기되었다. 당시 서귀포 지역 주민들은 학교를 세워야한다는 여론을 확산시켜 드디어 1920년 10월에 4년제의 서귀 공립 보통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문화 정책을 표방하면서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해 1922년 제2차 조선 교육령 개정을 공포하였다. 학교 설립에 인색하던 일제는 1면 1교제를 시행하여 각 면마다 초등학교의 설립이 이루어졌는데, 제주시 애월, 한림, 김녕을 비롯하여 서귀포에는 성산 보통학교가 개설되었다. 1927년 5월에는 좌면 보통학교가 개설되었는데 이는 현재의 중문 초등학교로서 현 서귀포시 지역에서 두 번째로 개설된 학교였다.
또한 조선 총독부는 1938년 3월 제3차 조선 교육령 개정을 공포하였는데, 종래의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라 개칭하여 일본인 학교의 명칭과 동일하게 하였다. 이에 서귀 공립 보통학교는 서귀 북 공립 심상소학교로, 또 일본 거류민 학교인 서귀포 공립 심상소학교는 서귀포 남 공립 심상소학교로, 좌면 공립 보통학교는 중문 공립 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1면 2교제가 실시되어, 1938년 5월 신효 공립 심상소학교[현 효돈 초등학교]가, 1940년 7월에는 도순 공립 심상소학교가 개교하였다.
한편 1941년 4월 1일부터 각 심상소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개칭하여, 서귀 북 공립 국민학교, 서귀 남 공립 국민학교, 신효 공립 국민학교, 도순 공립 국민학교로 불리게 되었다.
1943년 3월에는 제4차 조선 교육령 개정을 공포하여,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 양성에 목적을 두고 1면 3교제를 실시하였다. 같은 해 4월 서호 공립 학교가 개설되고 1944년 4월 상예 공립 국민학교가 개설되었다. 당시 서호 공립 학교의 전신은 서호 간이 학교인데 1934년 4월에 서귀 보통학교 부설 서호 간이 학교로 운영되어온 바 있다. 당시의 간이 학교는 수업 연한이 2년으로 완성되는 단급 학교로서 1인의 교사가 운영하였다. 이는 벽지의 농촌 아동에게 일본어를 익히고 산업 인력을 단기간에 양성․일본인화(日本人化)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제주도 내 산간 오지 마을에 10여 개교나 되는 간이 학교가 존재하다가 1943년 이후 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
3) 한국인의 중등 교육, 제주도 공립 농업 실수 학교
농업을 교수하는 실업 보수 학교는 수업 연한을 1년 이내로 단축할 수 있고, 입학 자격은 12세 이상인 자로서 보통학교 졸업자이면 가능하였기에 서귀포 지역에 제주도 공립 농업 실수 학교가 설치되었다. 1936년 5월 29일 설립 인가되어 개교한 이 학교를 통칭하여 서귀 실수 학교라 불렀으며, 1943년 4월 1일 2년제로 개편하여 학급당 정원 50명이 수용되는 2개 학급으로 편성․운영하였다. 입학생은 추자면을 제외한 도내 12개 읍면에서 읍면장이 추천하는 자 중에서 선발하였는데, 이 학교에 재학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농촌에 살면서 농업에 종사할 자로 제한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졸업생 수는 9회에 걸쳐 총 268명을 배출하였는데, 광복 이후에 서귀포 공립 초급 중학교로 개편, 인가되었다.
4) 개량 서당 교육
1910년대에 제주도에서는 보통 교육과 중등 교육을 통한 신교육이 실시되면서 재래의 한문 서당은 점차 위축되어갔다. 이는 근대적 교육 기관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교육 활동으로 각광받게 되면서 서구식 신식 교육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 민족에 의해 재래의 서당을 개량하여 근대적 초등 교육 기관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당시 각 면에 1개교의 보통학교가 개설되었으나 그 통학권을 벗어난 지역에는 개량서당, 즉 사숙을 주민 스스로 개설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1905년 중문리의 개성 학숙을 시작으로, 1920년대에는 서귀포 보목리의 일신 학숙, 신효리의 양원 학숙, 중문리의 진수 의숙, 하예리의 진성 의숙, 강정리의 광제 의숙, 진명 의숙 등이 개설되었다. 1930년대에도 서귀포 서호리의 중앙 의숙, 법환리의 법환 서숙, 토평리에 보신 사숙 등이 개설되었다.
이처럼 당시 개량 서당은 근대 교육의 교과를 사용하고 교원도 신교육을 받은 사람을 채용하여, 정규 학교를 대신해 신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 교육의 장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당시 민족 교육의 온상이었던 사립 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비정규 교육 기관인 서당, 야학, 강습회 등을 통해 그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이에 따라 서당 수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1918년 서당 규칙을 제정하여 서당에 대한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는 서당 규칙을 개정하여 서당의 설립을 도지사 인가제로 하여 설립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기존 서당을 폐쇄하는 등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에는 서당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일제 중반기까지의 이들 개량 서당은 근대 교육 시설이 부족하고 의무 교육이 실시되지 못하던 시대에 근대적 초등 교육을 실시하여 교육의 저변 확대와 더불어 문맹 퇴치에 큰 구실을 하였으며, 민족의식 고양과 애국 계몽 운동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5) 야학
일제 강점기의 보통학교 및 간이 학교의 교육은 일본 제국주의에 동화하도록 강요하는 철저한 황민화 교육이었다. 이에 반해 보통학교나 간이 학교 또는 개량 서당에도 갈 수 없는 기층 민중에 대한 교육이 제주도 내에 존재했다. 대체로 이러한 교육 활동은 학술 강습소란 명칭으로 허가 받고 농한기나 야간에 교육 활동이 이루어져 흔히 야학이라고 불렸다.
즉, 야간에 수업을 하는 비정규의 학교 또는 강습회를 야학이라고 부르고, 야간 학교가 밤에 운영되는 정규적인 교육 기관임에 비하여 야학은 주로 민간 단체나 학생들이 근로 청소년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 등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비정규직 교육 기관이었다.
그리고 당시 야학소의 운영자나 운영 단체와 가르치는 교사를 중심이 되어, 일제하 식민지 제도 교육으로부터 배제된 기층 민중들의 의식화를 위한 민중 교육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운동이 바로 야학 운동이었다.
제주도의 야학 운동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제주 청년들이 계몽 운동 차원에서 노동 야학을 개설하고 교사로 참여하여 대중 계몽을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렇듯 1920년대의 야학 운동은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청년들을 담당자로 시작하였고 후반기에 가서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농후해졌다.
1930년대 초, 소위 “서귀리 독서회 사건[불온 야학사건]”이라 하여, 서귀리의 이도백과 하예리의 김춘지 등의 교양 지도를 받은 서귀리 출신의 송순혁, 송달오, 변성현, 강원화 등이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독서회를 개설하였는데, 이들은 동지를 규합하고 서귀 지구 각 마을 야학소의 청소년을 계몽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에 사회 과학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면서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을 펴기로 하였으나 일제 당국에 의해 탄로나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렇듯 야학은 근대 교육 운동이 확산되는 자강 운동기부터 야학 운동으로 발흥하는 계기를 맞이하면서 특히 3·1 운동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농민·노동 운동 등 민중 운동의 진전과 실력 양성 운동의 활성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