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742 |
---|---|
한자 | 商業 |
영어의미역 | Commerce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봉 |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이루어지는 상품과 용역을 사고파는 산업.
[개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상업은 서울의 육의전(六矣廛)을 주축으로 시전들이 중심이 되어 왔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서울 이외에도 개성·평양·수원 등지에 시전이 형성되지만, 대부분의 지방에는 상설 시장이 없었다. 지방의 시장은 대부분이 정기 시장이었으며, 현재까지 재래시장의 형태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울릉군의 경우 이러한 재래식 정기 시장이 발달하지 못했다.
[변천]
울릉도는 개척 이전에는 국가의 통제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살지 못했고, 개척 이후에도 대다수의 입도민들이 겨우 자급자족하면서 생활할 정도서 잉여 생산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기적인 시장을 통한 상업 활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개척 이후 울릉군에 두드러진 상업 활동이 나타난 것은 울릉도와 인근 어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일본인과의 교역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울릉군의 육지에서 나는 천연의 약초와 미역, 김 등과 같은 해조류를 울릉군으로부터 사갔다.
약초로는 후박(厚朴)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는데 연간 5,000여 근이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그 외에도 콩·향목·규목·감탕목즙 등이 일본으로 팔려갔는데 울릉군의 수요량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본으로 팔려나간 것이다. 특히 감탕목은 개척당시에는 흔했으나 일본과의 상업 활동이 시작되면서 벌채로 인해 지금은 희귀 수종이 되었을 정도로 많은 교역량을 차지했다.
이러한 일본과의 교역에서 주로 주도권은 일본인에게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은 생필품을 울릉 주민들에게 비싸게 팔고 울릉군에서 나는 양질의 토산물은 헐값에 가져가며 많은 이득을 남겼다.
제대로 된 시장이 없었던 울릉군의 주민들은 일본인의 생필품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그 값으로 토산물을 값싸게 지불해야 했었다. 이것을 일본인들이 적절히 이용하여 상업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일제 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해방 이후 울릉군의 상업은 전과 비교했을 때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상업의 중심이 되는 시장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개개의 상점에서 일반적인 생필품이 매매되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울릉군이 관광지로 주목받으면서 관광 산업과 연관한 상업 활동과 서비스업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황]
울릉군의 도소매업 현황을 살펴보면, 1994년 울릉군의 도소매업 사업체 수는 250개소에 종사자 수는 397명이었다. 이는 전체 사업체 수의 28.1%, 종사자 수의 12.6%를 차지하는 수치이다. 이후에도 점점 증가하여 1998년에는 사업체 수 305개에 종사자 수 540명을 기록하였다. 2009년 12월 현재 도소매업의 사업체 수는 236개이며, 종사자는 408명이다.
울릉군의 주요 서비스업은 숙박 및 음식점업, 부동산 및 사업서비스업, 교육 서비스업, 오락·문화 및 운동 관련 서비스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숙박 및 음식점업의 경우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외환 위기의 여파로 감소 추세로 변하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 다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09년 12월 현재 334개소에 739명이 종사하고 있다. 이렇게 최근 들어 숙박 및 음식점업의 종사자가 증가하는 것은 울릉군이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관광객 수가 증가하는 데 따른 것이라 보인다.
부동산 및 사업서비스업의 경우 2005년 15개소의 사업체에 38명의 종사자가 있었으나 2009년에는 2개소에 종사자는 4명으로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오락·문화 및 운동 관련 서비스업은 2000년대에 접어들기까지 거의 불모지에 가까웠으나 2000년 이후 관광 인구의 증가와 삶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각광받고 있는 추세이다. 2009년 12월 현재 울릉군에는 19개소의 사업체에 50명이 종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