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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녕공립보통학교 만세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29
한자 新寧公立普通學校萬歲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6일 - 신녕공립보통학교 만세 운동, 교사 박필환이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 운동 독려가 계기가 됨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6일연표보기 - 신녕공립보통학교 만세 운동 발발
발생|시작 장소 신녕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지도보기
성격 만세운동
관련 인물/단체 박필환

[정의]

1919년 3월 6일부터 4월 8일까지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면 신녕공립보통학교의 교사 및 학생들이 전개한 만세 시위 운동.

[개설]

신녕공립보통학교 만세 운동은 교사와 학생들이 야간에 전개한 만세 시위 운동이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되어 5월 중순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만주·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계속되었다. 비폭력·일원화·대중화 등을 원칙으로 한 3·1 운동에는 청년·학생·농민·노동자 등이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3·1 운동은 국내외 정세에서 발생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국내적으로는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 많은 고통을 받은 한국인들의 분노가 해방을 갈구하는 도화선 역할이 되었다.

국외적으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 등이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는 피억압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한층 고무시켰다.

[경과]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은 만세 시위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3·1 운동은 영천 지역에서는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전개되었다.

영천 지역의 만세 시위운동은 영천군 신녕면에 있는 신녕공립보통학교의 교사 박필환(朴弼煥)이 주도했다. 박필환은 3월 16일 밤 동교 졸업생 이성백(李成白)을 통해 신녕면 왕산동(旺山洞)과 매양동(梅陽洞)에 사는 학생 20~30명을 학교 운동장에 불러 모아 “너희들은 기백이 없는 것이다. 아무쪼록 조선 각지에서 일어나는 만세 시위운동을 본받아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이어 3월 26일 박필환은 동료 교사 이석형(李錫瀅), 친구 황응두(黃應斗)와 함께 신녕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한종수를 만나 귀가하던 중 완전동 포교소 및 화성동 주재소 앞에서 각각 독립 만세를 수차례 고창하였다.

박필환의 영향을 받은 신녕공립보통학교 황정수(黃正秀)·김호용(金浩溶)·박칠성(朴七星)·구위준(具渭浚) 등 4명은 4월 6일 오후 3시 30분경 신녕면 완전동 노영수(盧永秀)의 집에 모였다.

황정수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집 뒤뜰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독립 만세를 외치자 나머지 참석자들도 함께 연호하였다. 그날 밤 11시 30분경 조표이(曺瀌伊)와 보통학교 학생 15명도 매양동의 동방천변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읍내로 행진하려다 경찰에 의해 해산당하고 관련자 18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농업에 종사하던 북장로파 기독교 신자 김준운(金俊運)은 4월 초순 한국이 독립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김준운은 4월 6일 오후 1시경 신녕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만나 4월 8일 신녕시장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하기로 하고, 그날 오후 10시경 왕산동 교회당에 가서 허석(許石)에게 시위운동의 지도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신녕보통학교 학생들은 4월 6일 야간에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모두 검거되었으므로 4월 8일 예정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결과]

신녕공립보통학교 교사 박필환은 5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박필환의 영향을 받은 친구들 역시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황정수는 징역 10월, 김호용·박칠성·김해오는 각각 징역 6월, 조율이·구위준은 각각 징역 4월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김준운은 체포되어 4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 받았다.

[의의와 평가]

3·1 운동은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전개된 항일 독립 운동이었다. 영천 지역인들은 반일 의식과 민족 의식으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일제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 시위 운동은 1920년대 노동 운동·농민 운동·청년 운동·형평 운동 등 부분별 민족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나아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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