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52
한자 朴鍾夏
영어공식명칭 Park Jongha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3년 4월 4일연표보기 - 박종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박종하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4년 5월 4일연표보기 - 박종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연표보기 - 박종하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박종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24 지도보기
활동지 창수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종하는 1883년 4월 4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이다.

[활동 사항]

영덕군 창수면의 3.1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9일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약 200명의 군중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사건을 말한다. 창수면 만세운동은 이수각(李壽珏)·이현설(李鉉卨)·이종구(李鍾龜) 등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창수동의 이수각(李壽珏), 신리동의 이현설(李鉉卨)과 권재형(權在衡), 인량동의 이현우(李鉉祐)는 동지를 규합하여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각 마을 주민들에게 권유하였다. 오후 4시 무렵, 약 200명의 군중은 각자 태극기 및 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창수동 구장 김재수(金在守)와 신리동의 권덕명(權德明) 등은 큰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독려하였다. 이어 창수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의 건물 및 기구를 파괴하였다. 창수주재소 사무실과 숙소 등 건물 3동의 문·벽·천장·문등(門燈)과 게시판·변소·목욕탕 등이 파괴되고 유치장의 기둥 및 마당의 나무는 절단되었다. 사무실 서류와 기구, 총 3정과 대검 2정이 부셔졌으며, 순사들의 가구·의류·식기 등을 전부 파손되었다. 만세 군중들은 오후 7시가 되어서야 해산하여 각자 귀가하였다.

박종하는 이현우·권재형·이현설·박치운 등의 지휘 아래 주재소에 온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짖었다. 곧이어 박종하는 같은 마을인 신리동 출신의 이석범, 창수동의 김반석·박계도, 장구동의 박숙이, 창수동의 박재흥·윤학근 등과 함께 몽둥이를 이용하여 창수주재소 벽을 무너뜨렸다. 박종하 외에도 장구동의 오만이, 오촌동의 이기성, 길상동의 김중규, 신리동의 신갑수 등은 돌로, 창수동의 유말동, 신리동의 정석출 등은 발로, 신리동의 황부칠·우주일·김도치 등은 손으로, 창수동의 백수학·이선봉, 신리동의 정재주·오해봉·김연순·김덕규·정학수 등이 주재소 벽을 무너뜨리는 데 함께하였다.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창수면 3.1운동 가담자들이 체포되었다. 체포자들 가운데 96명이 1차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박종하를 비롯한 74명은 2차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종하는 4월 22일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상고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건조물손괴, 기물훼기, 공문서 훼기, 보안법위반, 상해로 징역 1년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묘소]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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