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지역 반촌의 사회와 문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18
한자 寧海地域班村-社會-文化
영어공식명칭 Social and cultural character of nobility village in Yeonghae area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기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축산면·창수면·병곡면 일원에 발달한 반촌의 사회문화적 특성.

[개설]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지역에는 조선시대 이후 유수한 반촌이 형성되었다. 또한 학문과 절의를 숭상하고 혼인으로 연대하며 지금까지 반촌 특유의 문화를 전승해 오고 있다.

[무향(武鄕)에서 문향(文鄕)으로]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축산면·창수면·병곡면 일원은 조선시대 영해도호부 권역이었다. 이 지역은 고대 우시국(于尸國)이란 소국이 터전을 일구었던 지역이다. 이후 신라에 복속되었으나, 한때는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국경에 인접한 변방으로서 항상 군사적 긴장감이 감도는 지역이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왜구를 비롯한 외적의 침입이 빈번하여 조정에서는 영해부에 진을 설치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어 영양·영덕·청하·울진 지역을 통할하여 비상시 외적을 물리치도록 하였다. 이처럼 동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요충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영해 지역은 '무(武)'를 숭상하는 궁마지향(弓馬之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이 지역 출신 인물 중에는 무과 급제자와 무관 출신이 많다.

그런 영해 지역에 고려 후기 유학이 전래되면서 문풍이 진작되었다. 영해도호부의 사록(司錄)으로 부임한 역동(易東) 우탁(禹卓)[1263~1342], 호지마을 함창김씨 가문에 장가든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과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공민왕의 세자 사부가 된 대흥백씨 득관조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1303~1374], 영해에서 귀양살이를 한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 등이 이 시기 영해 지역과 인연을 맺어 유학을 전파한 주요 인물들이다.

영해 지역의 문풍은 조선시대 이후 퇴계학통을 계승한 유학자들에 의해 더욱 번창하였다. 퇴계의 학문을 영해 지역에 전수한 인물로는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1520~1588]를 들 수 있다. 김언기는 영해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백인국(白仁國)[1530~1613], 백현룡(白見龍)[1543~1622], 남의록(南義祿)[1551~1620], 박의장(朴毅長)[1555~1615] 등에게 유학을 전수하고 영해의 사족들을 퇴계의 문하로 연결하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영해 지역 유학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더욱 성숙된다. 특히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1619~1672]과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1627~1704] 형제는 ‘퇴계 이황―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로 이어지는 퇴계학맥을 계승한 영남 유학의 대표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이 시기 영해 지방은 토착 성씨들이 점차 퇴조하고 새로이 이주해 온 대흥백씨·영양남씨·무안박씨·안동권씨·재령이씨 등의 사족들이 영해평야와 동해안의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사회·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영남학파의 일원으로 정치·사회적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향촌 내 여러 곳에 집성촌을 이루어 동해안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유수한 반촌을 형성, 발전시켰다. 이로부터 영해 지방을 ‘소안동(小安東)’이라 부르게 되었다.

[결사보국(決死報國)하는 충의(忠義)의 산실]

유학은 예(禮)와 의(義)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아 효행과 충절의 실천에 진력한다. 이러한 유학 정신은 부모를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가족문화를 정착시키는 한편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결연한 의지로 나타난다.

영해 지역에 뿌리를 내린 유학은 반촌을 중심으로 효를 숭상하는 예학으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때는 한 몸과 한 가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결사보국의 충절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영해 유림들의 결기는 임진년의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무관으로 시무하던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책을 읽던 선비들과 밭을 갈던 농부들도 책과 쟁기를 팽개치고 나라를 구하는 의병창의에 한마음으로 나섰다.

경주성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박의장(朴毅長)과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강화의 중책을 수행한 박의장의 아우 박홍장(朴弘長), 웅치전투에서 적을 물리치고 전사한 정담(鄭湛) 장군은 무관으로서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며, 선비로서 의병을 일으켜 살신성인의 충절을 보여준 인물들도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남의록(南義祿)·남경훈(南慶薰) 부자, 백현룡(白見龍)·백중립(白中立) 부자, 백인국(白仁國)·백민수(白民秀) 부자, 이함(李涵)·이시청(李時淸) 부자, 정담(鄭湛)의 아들 정승서(鄭承緖), 백충언(白忠彦)과 백사언(白士彦) 형제, 조카 3명과 함께 창의한 권응주(權應周) 등은 모두 집성 반촌의 대표적인 가문에서 성장하고, 일신과 가문의 안위에 앞서 오로지 나라를 위해 충절을 실천한 인물들이다. 이러한 영해 지역 반촌의 애국정신은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말 의병활동과 일제 아래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영해 지역의 대표적 반촌들]

영해 지역의 대표적인 반촌으로는 창수면 인량리오촌리, 영해면원구1리괴시1리[호지마을], 괴시2리[관어대], 병곡면 송천리, 축산면 도곡1리 등을 꼽을 수 있다. 창수면 인량리는 영해 지역의 대표적인 12가문이 정착 초기에 이 마을을 거쳐갔으며 8가문이 종가의 터를 잡은 마을이다. 창수면 오촌리존재 이휘일의 후손들이 세거한 마을이며, 영해면 원구1리는 영양남씨·대흥백씨·무안박씨가 나란히 500년간 세거한 마을이다. 괴시1리는 17세기 중엽 이후 영양남씨가 세거한 마을이며, 괴시2리와 병곡면 송천리는 안동권씨의 집성촌이다. 축산면 도곡1리[번계]는 무의공 박의장의 후손들이 세거한 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마을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17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반촌으로서의 위상을 뚜렷이 한 것으로 보인다. 반촌은 저명한 인물이 정착한 후 여러 대에 걸쳐 자손이 번성하고 후손들의 행적이 지역사회로부터 높이 평가될 때 반촌으로 인정받는데, 앞에서 열거한 각 마을의 대표적 가문들이 17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다수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고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유림활동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중엽 영해 지역에서는 '대명천지(大明天地)'라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안동권씨의 대자(大字) 항렬과 영양남씨의 명자(明字) 항렬의 인사들이 학문과 행의가 출중하여 지역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담아 표현한 말이라 한다. 대자 항렬은 안동권씨 입향조 권책(權策)의 9세손들이며, 명자 항렬은 영양남씨 난고 남경훈의 증손자들이다. 대흥백씨 집안은 ‘5흥가(五興家)’라 일컬었다고 한다. '흥(興)' 자를 돌림자로 하는 백인국의 증손자 5형제를 이르는 말이다.

무안박씨 집안에서도 박의장의 아들 박륵(朴玏)과 박선(朴璿), 박륵의 아들 박문약(朴文約)이 영해 유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재령이씨 집안에서도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시명의 아들 이휘일·이현일이 영남 유학의 대표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이렇게 보면 17세기 중엽을 전후한 이 시기는 영해 지역에 반촌이 뿌리를 내린 시기라 할 수 있다.

[명문가의 혼맥]

조선 중기 이후 영해 지역의 명문가로 자리 잡은 다섯 성씨들은 학문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혼인을 통해서 더욱 긴밀한 유대를 형성한다. 입향 초기에는 기존의 토성들과 혼인을 맺어 영해 지역에 정착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흥백씨 입향조인 백견영해박씨 박감의 사위가 되어 병곡면 각리에 정착하였다가 인량리로 이거하였고, 무안박씨 입향조 박지몽야성박씨 박종문의 사위가 되어 창수면 인량리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토착 성씨들이 점차 퇴조하고 다섯 성씨가 영해 지역의 명문가로 부상하면서 다섯 성씨 상호 간의 혼인이 크게 증가한다.

영양남씨 입향조인 남수대흥백씨 입향조 백견의 현손 백린의 사위가 되어 울진에서 영해 인량리로 이거하였는데, 손자 남비 부자가 원구리에 정착하고 뒤이어 대흥백씨 백인국원구리에 입촌하면서 양 가문의 혼인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백인국은 남비의 장현손 남경일을 사위로 삼고, 남경훈의 딸을 장손자 백원발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대흥백씨 5흥가로 일컫게 된 5형제가 바로 백원발의 아들들이다. 이들 중 큰아들과 셋째아들도 영양남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후 영양남씨대흥백씨는 서로 선호하는 혼반, 즉 길반(吉班)으로 의식하여 빈번하게 혼인을 교환하였다.

무안박씨 박지몽남수의 증손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고, 영양남씨의 원구리 입향조인 남비의 아들 남한립을 사위로 삼는다. 이후 무안박씨영양남씨 사이에도 빈번하게 혼인이 이루어졌다.

재령이씨 입향조 이애(李璦)의 손자 이함(李涵)무안박씨 박홍장의 딸을 맏며느리로 삼고, 박홍장의 형 박의장의 딸을 둘째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친정 사촌자매가 혼인 후 친동서가 된 것이다. 또한 박의장의 아들 박륵은 이시명의 아들 이휘일이현일을 사위로 삼아 박륵과 이시명은 전형적인 겹사돈이 된다. 원구리의 무안박씨와 인량리의 재령이씨는 이러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양촌계(兩村契)를 결성하고 오늘날까지 매년 정기적인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안동권씨무안박씨 사이에도 혼인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박지몽의 둘째아들 박양기(朴良基)의 증손 박덕립(朴德立)은 안동권씨를 며느리로 삼고 딸을 안동권씨에게 시집보낸다. 박덕립의 아들 박영발(朴英發)도 두 딸을 안동권씨 집안에 시집보낸다. 박의장의 둘째아들 박위(朴瑋)는 손녀를 안동권씨 집안에 시집보내고, 넷째아들 박선(朴璿)은 안동권씨를 맏며느리로 맞아들인다. 이러한 혼인관계와 더불어 도와 박선을 제향하던 도계정사(陶溪精舍)에 관어대 안동권씨의 중심인물인 대은(臺隱) 권경(權璟)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도곡리 무안박씨와 관어대 안동권씨는 더욱 긴밀한 유대가 형성되었다.

영양남씨안동권씨 사이에도 혼인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영양남씨 원구리 입촌조인 남비의 현손인 남경일과 남경훈의 후손들이 안동권씨와 혼인을 많이 교환하였다. 남경일과 남경훈은 사촌 간인데 남경훈의 둘째아들이 남경일의 후사를 이었기 때문에 생가로 보면 모두 남경훈의 후손이 된다. 이들의 증손자 대부터 안동권씨와의 혼인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서로 며느리를 맞아들이고, 딸을 시집보내고 있다. 이 시기는 ‘대명천지’로 일컬어질 만큼 양 가문이 번성하던 시기이다.

이렇게 혼인이 중첩됨으로써 다섯 성씨는 지역사회의 거대한 혼반을 형성하며, 구성원들은 처가, 외가, 처가의 외가, 외가의 외가로 서로 연결되고 있다.

지역사회 내에서 특정 가문들 사이에 혼인이 중첩되는 것은 가격(家格)에 맞추어 혼인할 수 있는 혼반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그 수는 매우 적지만 영해 지역사회를 넘어서 안동이나 경주 지역의 명문가와 혼인을 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는 학맥이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안동의 장흥효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장흥효의 사위가 된 갈암 이현일과 하회의 유성룡 손녀와 혼인하고 처숙부인 수암 유진의 제자가 된 박의장의 넷째아들 박선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근대까지 이어져 영해 지역 반촌의 주요 인사들이 안동이나 영양·경주 등지의 명망가에서 배우자를 맞아들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문 간의 협동과 친화]

한국의 종족집단은 특정한 조상의 남계 자손들로 이루어진 혈연집단이다. 그러나 종족집단은 혈통의 계승에 그치지 않고 조상의 사회적 지위를 계승한 신분집단이며, 조상이 남긴 정신적 자원을 공유하는 문화집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족집단은 혈연적 배타성과 신분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배타적 족결합을 하게 된다. 종족집단이 갖는 이러한 특성은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심각한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 특히 유명한 조상을 모시고 있는 종족집단들이 한 마을이나 좁은 지역사회에 함께 살 때 이러한 가능성은 높아진다. 집성촌이 대개 한 성씨로 이루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영해 지역에는 조상의 위세가 강한 종족집단이 오랜 세월 한 마을에 공존하거나 좁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면서도 이러한 갈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생활 과정에서 사소한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집단갈등으로 표출되지 않는 것은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여 학문적 연원을 공유하고 있고, 가문과 가문 사이에 혼인이 누적되어 과도한 경쟁이나 갈등이 사전에 예방되거나 쉽게 해소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경쟁과 갈등을 넘어 협동과 친화의 세상을 열어가는 이러한 전통이 후세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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