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62
한자 尹善道
영어공식명칭 Yoon Seondo
이칭/별칭 약이,고산,해옹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채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7년연표보기 - 윤선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8년 - 윤선도 별시문과 초시 장원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8년 - 윤선도 경상도 영덕 유배
몰년 시기/일시 1671년연표보기 - 윤선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75년 - 윤선도 이조판서 추증
출생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유배|이배지 경상도 영덕현 - 경상북도 영덕군
묘소|단소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183-7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해남
대표 관직 사헌부 지평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가계]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이다. 생부는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이며, 양부는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백부 윤유기(尹唯幾)이다. 부인은 남원윤씨이다.

[활동 사항]

윤선도는 26세 때인 1612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628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대군의 사부로 출사하여 여러 요직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항복 소식을 듣고 해남 보길도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몇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호란 후 서울에 올라와서도 임금께 서둘러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1638년 6월 경상도 영덕현(盈德縣)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귀양에서 풀렸지만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현종 연간 예론(禮論) 문제로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다 파직되어 다시 유배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윤선도가 영덕에 유배된 기간은 1년 남짓 된다. 짧은 기간 영덕 고불봉 밑에 머무는 동안 윤선도는 지역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며, 문인을 양성하였다. 대표적인 영덕 지역 문인으로는 신이겸(申履謙)·신이상(申履常) 형제 등이 있다.

[학문과 저술]

윤선도의 유고로는 6권 6책의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전한다. 윤선도의 영덕 유배 기간은 비록 1년이 채 못 되었지만 적벽봉·임경대·고불봉 등 영덕의 경치를 담은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다. 이에 영덕군에서는 2006년 3월 11일 윤선도를 기리고자 「새 거처에서 한가위를 맞이하다 2수[新居對仲秋月 二首]」 시비를 창포풍력단지 삼거리에 건립하였다.

[묘소]

윤선도의 묘는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183-7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윤선도는 1675년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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