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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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年運動 |
영어공식명칭 | Youth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운동.
[개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청년운동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마련되었다. 이에 1920년대 초반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청년 단체들이 폭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청년 단체들에 의한 청년운동은 1920년대 민족운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1920년대 초반 영주 지역 청년운동 단체의 설립]
1920년대 초 청년운동은 지역의 유지와 지식인, 청년층을 중심으로 지식 계발·문화 창달·체력증진을 목적으로 한 문화 계몽운동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런 가운데 1920년 6월 영주청년회, 1920년 8월 풍기기독청년회와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 1923년 풍기구락부와 풍기청년회 등 청년운동 단체가 영주 지역에서 결성되었다.
먼저 영주청년회는 영주 최초의 청년 단체였다. 영주청년회는 “청년자제가 대개 안일과 고식(姑息)의 폐풍(弊風)을 개량치 못하여 용감발양(勇敢發揚)의 정신이 핍소(乏少) 함이라”를 창립 취지로 삼았다. 또 적성함양(適性涵養), 학문 증진, 체육발전, 의사교환, 풍속 교정 등을 목적으로 표방하였다. 이는 지·덕·체의 삼육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실력양성론적 문화운동의 청년운동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주청년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개최, 강습회 설립, 체육행사, 단주동맹(斷酒同盟) 등의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풍기기독청년회와 엡윗청년회는 영주청년회와 더불어 문화운동 활동을 하면서도, 종교적 청년운동을 지향하는 청년운동 단체이다. 풍기구락부는 일본인이 포함된 단체로서 지역 유지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반면 풍기청년회는 실력양성론적 입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반적인 청년회와 달리, 풍기소작조합의 관계 속에서 창립되어 계급성을 강조하는 단체였다.
[1920년대 중반 영주 지역 청년운동의 변천]
1920년대 중반 청년운동이 민족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분화되는 과정이 영주에서도 일어났다. 풍기청년회는 1924년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에 가맹하여 전국적 흐름에 동참하였다. 1925년 조선청년총동맹의 조직 운영 방침에 따라 경북지방청년대회의 개최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1926년 1월에는 철우단(鐵友團)이 결성되었다. 철우단은 창립 취지를 통해 기존 청년단체들의 정신이 쇠퇴하고 사업이 미미한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이들은 창립 주체를 ‘무산청년’으로 설정하였는데, 영주 지역 청년운동에서는 처음 사용된 표현이었다. 이는 청년 단체의 성격이 문화운동에서 계급운동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 풍기청년회와 철우단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청년운동 단체였다.
그런 가운데 1920년대 중·후반 청년운동은 정치·경제·민족적 권리의 획득이라는 기치 아래에 전 민족적 청년 대중이 대상으로 설정되었으며, 군·부 단일동맹의 조직화로 전환되고 있었다. 1927년 11월 영주에서는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연합하여 영주청년동맹을 창립하였다. 영주청년동맹의 창립대회는 일제 관헌의 탄압과 방해로 대부분의 풍기청년회 출신 회원들이 참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겨우 열렸다.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는 영주청년동맹 창립과 함께 해산하고, 영주청년동맹의 지부로 재조직되었다.
영주청년동맹은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전개되던 신간회 운동 확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신간회 운동을 둘러싼 논쟁에서 신간회를 비판하는 논리에 대해 ‘특수성을 망각한 속학적 번역주의’라거나, ‘민족적 단일협동전선을 교란 작희하는 신중 간파’라고 규정함으로써 신간회 운동을 지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영주청년동맹은 영주지부와 풍기지부를 기반으로 이산·평은·단산·장수·순흥 등 모두 7개 지부를 결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변화된 청년운동 방침을 거부하며 지부 전환에 따르지 않던 순흥청년회 해산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후 영주청년동맹은 운동 방침을 같이하는 영주소년동맹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원하였다. 또 한해(旱害)에 따른 기근민 문제, 순흥공립보통학교 건물의 화재 대책 등 지역 현안에도 관여하며, 영주 지역민 이익 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제 관헌은 이러한 영주청년동맹의 활동을 방해하고 탄압하였다. 창립대회 방해를 시작으로 각종 대회와 행사를 금지시켰으며, 각종 사상 사건과 연루시켜 주요 간부를 불법적으로 체포·구금하였다. 그런 가운데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원산총파업이 발생하자, 영주청년동맹은 1930년 중순까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비난하며 저항을 촉구하는 격문 투쟁을 수차례 일으키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영주의 청년운동은 1920년대 전반기 실력양성론적 문화운동 차원에서 활동하였고, 풍기청년회 창립을 계기로 문화운동에서 계급적 성격의 청년운동으로 전환하였으며, 1927년 영주청년동맹의 창립을 계기로 더욱 정치적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영주의 청년운동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지역의 민족운동 발전과 확산에 이바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