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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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盛源 |
영어공식명칭 | Choi Seong-w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 최성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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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최성원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최성원 징역 1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26년 - 최성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최성원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최성원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최성원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
거주|이주지 | 최성원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
활동지 | 최성원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성원(崔盛源)[1894~1926]은 같은 마을의 안용호(安容鎬)[1884~1942]·남영진(南永鎭)[1894~1920]과 함께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최성원은 1894년 8월 12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최성원은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이에 1919년 4월 3일 오후 2시 무렵,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같은 마을의 안용호와 친구 남영진을 만나 각지에서 전개되는 3.1운동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안용호의 제의로 자신들도 1919년 4월 9일 풍기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의 풍기장터를 만세시위운동 장소로 정한 것은 인근 사람들이 이곳 장날에 많이 모여들기 때문이었다. 안용호가 먼저 종이로 태극기를 만들어 보이자 최성원과 남영진도 각각 태극기를 몇 장씩 만들어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최성원은 1919년 4월 9일 아침 일찍 안용호·남영진과 함께 태극기를 감추어서 풍기장터로 나갔다. 최성원은 어물시장을 만세시위 장소로 정해 놓고 때를 기다렸다. 오후 3시 30분경, 장꾼들이 모여들자 최성원은 안용호·남영진과 같이 어물시장과 쌀시장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호응해 온 군중 약 10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펼치려 하자, 갑자기 순찰 중이던 풍기주재소 일본군 헌병과 수비병들에 의해 군중은 해산되고 최성원 등은 체포되었다. 최성원은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최성원은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