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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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癸酉靖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용철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453년 10월 10일 -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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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수양대군|단종|김종서 |
[정의]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
[개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이 단종(端宗)[1441~1457]의 왕위를 빼앗고자 1453년 10월 10일 일으킨 사건이다. 선대 왕인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급서하여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약하였다. 문종의 부탁을 받은 김종서 등이 고명대신이 되어 단종을 보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수양대군은 강화되는 신권에 불만을 품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포함한 단종의 측근 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역사적 배경]
계유정난은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불과 2년 만에 급서하고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촉발되었다. 세종 대부터 급격히 신장된 신권은 단종의 즉위와 함께 더욱 강해졌으며, 실제 문종은 유명(遺命)으로 황보인·김종서 등 대신들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이로써 정권은 유명을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의 손에 들어갔고, 이런 배경에서 재상의 합의체인 의정부는 단순히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 기관 본연의 임무와 기능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수양대군으로 상징되는 왕실 종척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경과]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원년) 10월 10일 밤에 홍달손·양정 등 심복들을 동원하여 김종서·황보인 등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고, 대군(大君) 중 가장 큰 경쟁자였던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축출한 뒤 사사(賜死)하였다. 직후 수양대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스스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 여러 중직을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으며, 심복인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에 임명하여 새 조정을 구성하였다.
또한 단종을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압박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단종으로 하여금 스스로 측근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455년 윤 6월, 단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혜빈양씨를 청풍(淸風)으로, 상궁 박씨를 청양(靑陽)으로, 금성대군 이유(李瑠)를 삭녕(朔寧)으로, 한남군을 금산(錦山)으로, 영풍군을 예안(禮安)으로, 정종(鄭悰)을 영월로 각각 귀양을 보내고, 조유례는 고신(告身)을 거두고 가두었다. 그리고 이어서 6월 19일에는 금성대군을 광주(廣州)로 이배하였다.
[결과]
단종은 수양대군 일파의 겁박에 의하여 더 이상 왕위를 보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선위를 결정하였으며, 1455년(단종 3) 윤 6월 11일 경회루에서 수양대군에게 대보(大寶)를 전달하고 양위하였다. 이를 계기로 수양대군은 조선왕조의 제7대 임금인 세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계유정난의 결과 수양대군은 조정을 장악하였으며, 결국 그로부터 2년 뒤 단종에게 양위를 받고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가 되었다. 계유정난은 일반적으로 왕권과 신권의 대립 과정에서 촉발된 사건으로 설명되어 왔지만, 한편으로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계획한 정변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