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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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光勳 |
영어공식명칭 | Park Kwangho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엄찬호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7월 11일 - 박광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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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0일 - 박광훈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독립만세연명부」 작성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1일 - 박광훈 영월 금마리 독립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9일 - 박광훈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7일 - 박광훈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18일 - 박광훈 고등법원형사부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1년형 확정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5월 17일 - 박광훈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박광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금마리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
활동지 | 금마리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영월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광훈(朴光勳)은 1882년 7월 11일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21일 금마리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가계]
박광훈의 아버지는 주천면장을 역임한 유학자 박수창(朴受昌)이다.
[활동 사항]
박광훈은 4월 20일 오전 9시경 금마리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이병익(李炳翼)·이용헌(李容獻)·박수영(朴受永)·박재호(朴在鎬) 등에게 “이웃 군에서는 모두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친다. 우리들도 구한국 신민으로서 만세를 외쳐야 할 의무가 있다. 내일 군수가 온다고 하니 군수에게 권고하여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도록 하자.”라고 말하며 설득하였다. 이병익 등은 모두 찬성하고 독립 만세를 함께 외친다는 내용의 「독립만세연명부」를 작성하였다. 이후 박광훈은 이병익과 함께 탁원근(卓源瑾)·탁은상(卓殷相)·전수길(全壽吉)·박수우(朴受祐)·박수경(朴受景)·이인상(李寅相)·원하현(元夏鉉)·남상은(南相殷)·박수동(朴受東)·조종협(趙鐘協)·홍봉관(洪鳳官) 등에게도 독립 만세를 권유하여 서명을 받았다.
4월 21일 당시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농사 강연 등 민심 지도를 위하여 수행원 3명과 함께 금마리에 왔고, 오전 11시경 강연을 마치고 제천가도로 이동하였다. 이때 박광훈 등 30여 명의 군중은 군수 일행을 쫓아가 에워쌌고, 태극기를 군수의 손에 들려 주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라고 압박을 가하였다. 석명선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박광훈 등의 강요에 못 이겨 결국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세 시위가 확대되어 70여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 소식을 들은 영월헌병분견소 소속 헌병들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진압하였고, 박광훈은 박수경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박광훈은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고, 9월 18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상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광훈은 1938년 5월 1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광훈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