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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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時興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호제 |
[정의]
조선시대 예산을 중심으로 충청도 서부 지역으로 연결되었던 역도.
[개설]
시흥도(時興道)는 조선 세종 때부터 충청우도에 편성된 역도(驛道)였으며, 관할 범위는 평택(平澤)-천안(天安)-아산(牙山)-온양(溫陽)-예산(禮山)-당진(唐津)-태안(泰安) 등의 지역으로 연결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전기부터 편제되었던 시흥도가 폐지되면서 시흥도 소속의 8역이 금정도(金井道) 관할로 통합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驛)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문의 전달과 사신 및 관리의 여행에 마필(馬匹)을 제공하고 변방의 군정을 보고하던 곳이며,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원(驛院)이라 통칭되었다.
역도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찰방(察訪)[종6품]이나 역승(驛丞)[종9품]의 지휘 감독 아래 순행(巡行)·고찰(考察)하면서 역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전국의 각 역에는 찰방, 역승의 관장 하에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 등을 두어 역정(驛政)의 관리와 공역을 맡게 하였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82, 병지(兵志) 참역(站驛)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 전국에 22개 역도를 설치하였는데, 충청주도(忠淸州道)에서 관할하는 34개 역의 명칭과 현재 위치는 다음과 같다. 동화(同和)[현재 경기도 수원]·장족(長足)[수원]·청호(菁好)[수원]·가천(嘉川)[현재 경기도 안성시 양성]·율봉(栗峰)[현재 충청북도 청주]·쌍수(雙樹)[청주]·저산(猪山)[청주]·장지(長地)[청주]·장양(長楊)[진천]·퇴량(堆粮)[진천]·연산역(燕山驛)[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금사(金沙)[연산]·포곡(蒲谷)[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전의]·성환(成歡)[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신은(新恩)[천안]·금제(金蹄)[천안]·장세(長世)[아산]·창덕(昌德)[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이흥(理興)[아산]·일흥(日興)[예산]·광정(廣庭)[공주]·일신(日新)[공주]·탄평(坦平)[공주]·은산(銀山)[부여]·유구(維鳩)[공주]·유양(楡楊)[현재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급천(汲泉)[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홍주역(洪州驛)[홍성]·광세(光世)[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금정(金井)[청양]·득웅(得熊)[해미]·몽웅(夢熊)[해미]·영유(靈楡)[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비웅(非熊)[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 등 34개역이다.
『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1462년) 8월 5일 정묘조에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보다 먼저 제도(諸道)의 참역 또는 역승을 파하고 각각 그 부근에다 합하여 하나의 길을 만들어서 찰방을 두었으나, 관할 역이 많고 길이 멀리 떨어져서 찰방이 두루 살피기가 어려우므로 역로(驛路)가 조잔(凋殘)하니, 이제 다시 마감(磨勘)하여 대·중·소의 역로 및 원근을 나누어서 그 전의 역승을 각 역로에 차견(差遣)하여 찰방마다 역승 1명을 더 두게 하소서. 삼가 뒤에 갖추어 아룁니다. ...시흥역(時興驛)·창덕역(昌德驛)·일흥역(日興驛)·화천역(花川驛)·장시역(長時驛)·순성역(順城驛)·흥세역(興世驛)·급천역(汲泉驛) 이상 8역은 시흥도승(時興道丞)으로 일컫고[兵曹啓, 在先諸道站驛或罷, 驛丞各以附近合爲一道置察訪, 然所管驛多道里遙隔, 察訪未易遍察, 驛路凋殘, 今更磨勘分大中小驛路及遠近, 已前驛丞差遣各路, 每一察訪加設驛丞一. 謹開具于後. ...時興驛, 昌德驛, 日興驛, 花川驛, 長時驛, 順城驛, 興世驛, 汲泉驛 已上八驛, 稱時興道丞]”라고 하였다.
[변천]
시흥도는 세종 때부터 금정도·이인도(利仁道)와 함께 충청우도에 편성된 역도의 하나였다. 세종 때 시흥도는 5역을 관할하였고, 세조 때에는 8역이 역승의 관할 아래 있었다. 세종 때 금정도 소속이었던 급천역, 순성역, 흥세역 3개 역이 세조 때에는 시흥도 소속으로 개편되었다.
1700년을 지나면서 시흥도가 폐지되고, 시흥도 소속의 8역이 금정도 소속의 9역과 함께 금정도 찰방의 관할로 통합되었다. 숙종 연간에 간행된 『전록통고(典錄通考)』이전 하 외관직 충청도 역승조에 금정도 소속의 9역과 시흥도 소속의 8역이 별도로 기록[驛丞三員 利仁道屬驛, 龍田·恩山·楡楊·宿鴻·藍田·靑化·豆谷·新谷·靈楡. 金井道屬驛, 光時·海門·靑淵·世川·龍谷·夢熊·下川·豐田. 時興道屬驛, 昌德·日興·汲泉·順城·興世·長時·花川.]되어 있으나, 1757년(영조 33)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시흥도에 소속되었던 8역이 금정도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과]
시흥도는 세종 때부터 1700년대 초반까지 8역을 관할하던 역도였으나, 18세기 중엽 시흥도가 폐지되면서 시흥도 소속 8역이 금정도 관할로 통합되었다.
[의의와 평가]
시흥도는 세종 때부터 18세기 초까지 국가에서 지방의 공무수행 관리에 역마 및 숙박 편의 제공과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교통·통신제도이다. 국가경영상 중요한 기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품계가 높지 않은 찰방과 역승의 관할 아래 있었고 역제(驛制) 운영상 폐단이 많아지면서 편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