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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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禮山孝橋里埋香碑 |
이칭/별칭 | 마되바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예덕로 321-13[효교리 249-2]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고려 말 - 예산효교리매향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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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 - 예산효교리매향비가 매향비로 밝혀짐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6월 30일 - 예산효교리매향비 충청남도 기념물 제155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예산효교리매향비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예산효교리매향비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예덕로 321-13[효교리 249-2] |
성격 | 비석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85㎝[세로]|173㎝[가로]|44㎝[두께] |
관리자 | 예산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효교리에 있는 고려시대 매향비.
[개설]
예산효교리매향비는 고려 말에 제작된 것으로 예산군 봉산면 효교리에 있다. 매향비는 향과 함께 소원을 적은 비를 함께 묻어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염원하는 목적으로 제작된 비이다. 예산효교리매향비는 2001년 6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매향비는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염원하면서 향을 묻고 그 위에 세우는 비를 말한다.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두면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물에 넣으면 가라앉기 때문에 침향이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매향을 으뜸가는 향으로 삼고 있다. 매향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근거한 신앙 형태로, 향을 묻는 것을 매개체로 하여 발원자가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즉, 미륵불이 용화세계(龍華世界)에서 성불하여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때 그 나라에 태어나서 미륵불의 교화를 받아 미륵의 정토에서 살겠다는 소원을 담고 있다. 매향비는 말단 향촌 사회를 단위로 해서 구현되며 특히 발원자들이 공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 위기감에서 시작된 순수한 민간신앙이다. 매향비는 주로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발견된다. 예산효교리매향비는 보부상들의 말과 되를 재는 도량형으로서 속칭 ‘마되바위’로 불려지다가 1997년 한서대학교 오윤희 교수에 의해 매향비로 밝혀졌다. 매향비로 밝혀진 이후 가치를 인정받았다.
[위치]
예산군 덕산면사무소에서 고덕면 방향 도로를 따라가면 서북쪽으로 예덕로가 나온다. 예덕로를 따라 가면 서쪽에 예산효교리매향비가 있다.
[형태]
예산효교리매향비의 석질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는 세로 185㎝, 가로 173㎝, 두께 44㎝의 크기로, 두(斗)라고 부르는 둥근 홈은 가로 37㎝, 깊이 10㎝이고, 승(升)이라고 하는 네모진 홈은 가로 22㎝, 세로 9㎝, 깊이 7㎝이며, 홉이라고 부르는 네모진 작은 홈은 가로 14㎝, 세로 8㎝, 두께 5㎝이다.
[금석문]
예산효교리매향비는 돌의 홈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비문이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른쪽 석각은 “□□6년 계미 3월 12일(□□六年 癸未 三月 十二日)에 이산(伊山)과 덕풍(德豊)의 승려와 결연 향도들이 축대를 쌓아 비석을 올려놓고 고한다. 성에서 나와 용오리 들머리에 매향을 도감(都監) 승려들이 함께 하였다[□□六年 癸未三月十 二日伊山德豊袈裟 結(緣)香徒□告 城出龍吾里埜頭 埋香庫同].”라는 내용이다. 왼쪽 석각은 “뫼뿌리 사이에 일만(一万)[매향의 숫자로 추정]을 그리고 삼칠(二七)[매향의 숫자로 추정] 많은 나물로 향주(香[會]主)가 미륵 앞에 매향을 하였다[峯巒間一万 二七□□間□富菜(乘) 香(會)主埋香□(彌)勒前].”라는 내용이다
매향은 고려시대로 추측되는데, 비문의 내용에 이산과 덕풍의 지명이 보인다. 이산과 덕풍은 조선 태종 1405년 덕산으로 개편되기 때문에 이산과 덕풍이 공존하였던 시대를 본다면 고려 현종 1018년과 1405년 사이가 된다. 그리고 간지 계미자(癸未字)로 보자면 1043년[계미]~1403년[계미] 사이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400년 사이에 매향하였으며 승려의 개입으로 보아서 고려시대로 본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