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5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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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祠宇 |
이칭/별칭 | 사(祠),향현사(鄕賢祠),사묘(祠廟)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에 있는 조선 시대에 선현 혹은 선조를 추모하고 선조의 덕을 기리기 위해 제향을 하던 공간.
[개설]
사우(祠宇)는 조선시대에 선현을 제사하기 위해 건립된 제향 공간으로서 서원과 함께 유교를 향촌 사회에 보급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조선은 국가적으로 성리학의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선현 제향을 장려하였는데 이는 서원·사우 등의 건립으로 나타났다. 제향 대상은 충절 인물이나 저명한 유학자였으며 건립 주체로는 지역의 사림이 뜻을 모아 세우거나 문중의 후손들이 건립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향사 인물의 가향(家鄕)이나 거주지, 근무지, 강학지, 유배지, 순절지, 묘소 등의 인근에 건립되었다.
조선 초기에 사우와 서원은 기능과 제향 인물의 성격에서 차이가 있었다. 사우는 충절·효열 인물의 공덕을 기리는 의례 공간으로서 향촌민의 교화를 주된 목적으로 하였다. 반면 서원은 유교적 도학자를 주로 제향하였고 인재 양성과 강학 기능을 추가로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제향 인물로 사우는 순절인·무신·공신이, 서원은 유학자·문신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공간 구성에서도 사우는 선현 제사를 지내는 사묘(祠廟)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고 서원은 여기에 강당(講堂) 등의 강학을 위한 시설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7~18세기 이후에는 사우·서원이 남설되고 특히 개인 문중 중심의 사당적 성격으로 건립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예산군의 사우]
예산지역의 사우도 다른 지역과 유사하게 충절인, 공신, 유학자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예산 지역의 사우는 대부분 18~19세기에 건립되었다.
예산현 지역의 사우로는 집성사(集成祠), 목은영당(牧隱影堂) 등이 있다. 집성사는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나 『예산현읍지(禮山縣邑誌)』와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1840년경]의 기록으로 확인이 가능한 사우이다. 예산읍 관작리 거무실[옛 冠峰之下 黔溪之下]에 강문팔학사를 비롯한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사우로 주자와 송시열, 권상하 등 삼위를 봉안하였다. 삽교읍 이리 안다락리에 있는 목은영당은 이색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대흥 지역에는 우천사우(牛泉祠宇)와 세덕사(世德祠) 등이 현존하는데, 우천사우는 대흥에 유배와 1여년 만에 숨을 거둔 우천 이약수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기록상으로는 우천사, 우정재, 소천서원(笤泉書院) 등으로도 나타난다. 세덕사는 18세기에 건립된 사우로, 대흥현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靖公) 박국검(朴鞠儉)과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운 충민공(忠敏公) 박천성(朴天成)을 배향하는 밀양박씨의 사우이다.
독특한 예로, 대흥면 상중리의 소도독사(蘇都督祠) 터를 들 수 있다. 소도독사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사지냈던 곳으로 현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흥군읍지(大興郡邑誌)』 등의 기록으로만 확인된다. 현재까지 예산 지역에 있었던 가장 오래된 사우로 추정되며 고려의 성황당이 조선시대의 사우로 변모하는 모습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현대의 사우로는 덕산면 시량리의 충의사[1968년 건립, 윤봉길 제향]와 대술면 시산리의 충령사[1967년 건립, 호국영령 제향] 등이 있으며 예산군과 충청남도의 유림, 공직자 등이 건립에 동참하였다.
[평가와 의의]
사우는 지역에서 문중과 사림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 학맥 등 향촌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향촌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예산의 사우들은 지역과 관련성이 깊은 인물들을 제향하고 있어 예산 지역문화 연구에서 반드시 살피고 논의하여야 할 유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