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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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武官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지역에서 배출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문관과 무관.
[개설]
문무 관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 문관이나 무관을 역임한 관인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역임한 인물과 가자(加資)[조선 시대에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수직(壽職)[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벼슬아치와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의 시혜를 받은 인물을 지칭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관인은 크게 문반과 무반, 혹은 동반과 서반으로 나누어 불리기도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이를 양반이라 불렀다. 관료 체제가 정비되면서 조선시대에 『경국대전』에서 관인에게 부여되는 문·무산계(文武散階) 체계가 확립되면서 정1품에서 종9품에 이르는 품계에 맞추어 관리가 임용되었고 이를 문무 관인이라 칭한다.
[문무 관인의 종류]
예산의 문무 관인은 넓은 의미로 예산과 대흥, 덕산에서 지방관[현감]을 지낸 목민관, 예산에서 태어났거나 예산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예산 출신의 문무과 급제자와 관직자, 예산에 문화유적이 있거나 특별한 인연을 남긴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산 지역 문무 관인 기록 자료]
조선시대의 관리 선발의 주된 통로는 과거제도였으며, 과거제도는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로 운영되었다. 문과는 다시 소과와 대과로 나누어졌으며, 소과는 경학(經學)을 시험하는 생원과와 제술(製述)을 시험하는 진사과로 나누어졌다. 예산군은 조선시대 덕산현과 대흥현, 예산현 지역을 통합한 지역이다. 이러한 예산의 문무 관인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는 방목 자료인 생원과 진사 시험인 사마시 합격자 명부 『사마방목(司馬榜目)』, 문과 급제자 명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무과 급제자 명부 『무과방목(武科榜目)』이 있으며, 또한 각종 지리지나 읍지류 등에 인물조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여지도서(輿地圖書)』[1759],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1780], 『대흥군읍지(大興郡邑誌)』[1681]·『예산현읍지(禮山縣邑誌)』[18세기 후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1934]이 있다.
『대흥군읍지』의 경우 관안(官案)[선생안(先生案)] 항목이 따로 정리되어 있어, 대흥군에 재임했던 지방관들의 정보 등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 중종 대 대흥현감(大興縣監)으로 부임했던 장한공(張漢公)을 시작으로 숙종 대 윤식(尹寔)까지 대흥 지역 지방관들의 성명과 특기사항을 기재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무 관인]
예산, 덕산, 대흥 지역의 인물 중 대표적인 문무 관인으로 역사상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간략하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인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대흥현 인물 한문준(韓文俊), 한취(韓就)가 있다.
조선 전기 인물로 이계전(李季甸), 김구(金絿), 이담(李湛), 박홍(朴泓)이 있다. 이계전은 이색의 손자이며 문열(文烈)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김구는 조선 초기의 4대 명필 중 한 사람이며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받고 덕잠서원에 제향되었다. 이담은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하고 사화에 연루되었다가 후에 조광조의 시호를 요청하여 승인받았다. 박홍은 경상좌도절도사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최고의 정치가이자 문장 팔가의 일인이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산해(李山海), 장령과 목사를 역임한 이흡(李洽), 형난공신 2등의 한천군(漢川君) 조정(趙挺), 구봉 송익필 문하의 이영원(李榮元), 숭록대부와 판서에 오른 이경전(李慶全), 선무공신에 녹훈되고 ‘창렬사’라는 사액사당을 받은 정현룡(鄭見龍), 조선 중기 예산의 모습과 생활상을 시로 표현한 「월선헌 십육경가」의 저자이며 정헌(靖憲)이라는 시호를 받은 신계영(辛啓榮), 감찰과 군수직에 오른 박안행(朴安行), 3대가 모두 고위급 장수이며 각각 충장(忠壯), 한원군(韓遠君), 정익(貞翼) 등의 시호와 관작을 받은 이의배(李義培)·이목(李穆)·이여발(李汝發) 3대, 진무원종공신 1등이며 충의(忠義)의 시호를 받은 정치방(鄭治邦) 등이 존재한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야곡집』을 남긴 조극선, 정랑과 목사직에 올랐으며 효자 명정을 받은 박승휴(朴承休), 그리고 박승휴의 동생이자 우암 송시열과 도의지교를 맺은 박승건(朴承健), 강문팔학사 중 『강상문답』, 『동유록』 등의 저자 한홍조(韓弘祚)와 문헌(文獻)의 시호를 하사 받은 윤봉구(尹鳳九), 청백리 서해조(徐海朝), 판윤의 자리에 올랐으며 현재 영정과 요대, 옥배를 남기고 95세로 장수하며 궤장을 하사받은 서병덕(徐秉德), 전라좌수사 이길유(李吉儒), 숙헌(肅獻)의 시호를 받았으며 청백리로 이름을 날리고 『관서신미록』을 남긴 정만석(鄭晩錫), 판서와 대사헌을 역임한 김노경(金魯敬), 그리고 독창적 서체를 이룬 금석학의 대가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예산[예산, 덕산, 대흥]은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의의와 평가]
예산은 시기별로 다양한 성격의 문무 관인들이 배출되었고, 이들 가운데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업적과 유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다. 이를 통하여 예산 지역의 문화사적 성격과 의의를 재조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