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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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章峻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최명진 |
[정의]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종교인.
[개설]
문장준(文章俊)[1861~1945]은 관군과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예산으로 이거하여 활동하였던 동학농민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문장준의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아버지는 남성길(南成吉)이고, 방갈리 접주를 지낸 문장로와는 8촌간이다. 조명승(曺明承)이 사위이다.
[활동 사항]
문장준은 1861년 10월 14일 충청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서 태어났다. 1894년 2월 상암 박희인으로부터 동학을 전수받은 후 포교 활동을 시작하여 8촌인 방갈리 접주 문장로, 사위 조명승과 함께 방갈리 기포 모의를 주도하였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뒤 농민군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와 해산하였는데, 11월 15일 관군의 색출 작업으로 체포되었다. 서산으로 이송되었다가 해미성으로 잡혀가 10여 일 동안 고생하다가 당시 관군 지휘관인 이범서(李範緖)의 도움으로 문장권과 함께 풀려나 3일 만에 본가로 돌아왔다. 본가로 돌아온 이후 동학군들에 대한 민보군의 탄압이 극심하자 가족의 안전을 도모할 수 없어서 김선여(金善汝), 김성칠(金成七), 강운재(姜雲在), 김황운(金黃雲) 등과 가족을 데리고 도피하였다. 1895년 숙부의 집에 몰래 잠입하여 흩어진 동학교도 소식을 파악하고 박덕칠의 밀지를 전달하던 조석헌과 함께 동학도인의 규합을 위해 여러 포중을 돌며 도리 강론과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1897년 박덕칠의 공문과 200여 권의 교첩을 가지고 각 지역 지도자가 모인 동해리 조석훈 집에서 교수(敎授)에 임명되었다. 1909년 11월부터는 태안 대교정 조석헌 대신 관내 대소사를 총괄하였다.
문장준은 1913년 중앙시천교에 들어갔다가 1915년 중앙시천교가 흩어지자 다시 천도교로 돌아왔다. 갑오년 이후 원주 전걸언리에 은거하고 있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과 다부리에 있던 박덕칠 등의 동학 지도자들에게 은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이불과 옷까지 보태는 등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사망하였다.
[묘소]
문장준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효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