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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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禮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호제 |
[정의]
조선시대에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예산 지역에 설치되었던 공공시설.
[개설]
신례원(新禮院)은 충청도 내포의 각 지역과 서울까지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원(院)은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에게 숙식의 편의를 주기 위하여 교통로의 요충지나 인가가 드문 깊은 산속에 설치되었는데,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조선 왕조는 국초에 숭유정책을 내세워 사찰의 정리와 더불어 종래 사찰이 운영하던 원까지 모두 국유화하여 역참제(驛站制)의 보조기관으로 삼고, 환속한 승려 또는 인근 주민 중에서 덕망 있는 사람에게 그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대체로 도로 연변에 설치된 원은 30리[11.78㎞]마다 하나씩이었다.
조선시대에 충청도에 설치된 원(院)은 212개소였다. 그중에서 현재의 예산 지역에는 신례원[예산, 조선 초기까지는 신창현소속], 무한성원(無限城院)[예산], 고사원(古沙院)[예산], 봉용원(峯聳院)[덕산], 가방원(加方院)[대흥] 등 5개소가 있었다.
[관련 기록]
신례원은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창현 역원조에는 신창현 서쪽 20리[약 7.85㎞]에 있었던 것[親(新의 오자)禮院在縣西二十里]으로 기록되어 있다. 1757년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예산현 역원조와 1871년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신례원이) 예산현 북쪽 15리에 위치하며, 사신을 영접하고 역마를 지급하던 곳[在縣北十五里 使客出站處]”이라 하였고, 1861년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내포 11읍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대로[北十里 內浦十一邑 通京大路]”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신례원은 조선 초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내포 지역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례원 이외에 예산현의 무한성원(無限城院)과 고사원(古沙院), 덕산현의 봉용원(峯聳院)과 대흥현의 가방원(加方院), 청양현의 마양원(馬養院), 인여원(仁旅院), 건천원(乾川院), 가정자원(加亭子院) 등의 원이 17세기 중엽까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원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들의 원이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 연간에 간행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모두 ‘금폐(今廢)’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미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의 이용자가 한정되어 있었고, 재정 기반이 취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집권체제가 해이해지면서 봉건 정부의 경영 의지도 약화되어 16세기 중엽부터는 방치되는 원이 속출하였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에 의하면, 17세기 당시 “원은 주인이 없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거의 파괴되어 있었다.”라고 하였다. 운영되는 곳도 관리자가 있는 경우는 드물었고 땔나무와 음료수만 준비되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후 고을 관아 부근에 있던 객관(客館)[객사(客舍)]이나 큰 역에 부속되어 있던 역관(驛館)을 주로 이용하였다. 일부 원이 존속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원의 기능은 점차 쇠퇴하였고 대부분 소멸되어 갔다.
신례원은 내포 지역의 다른 원보다는 ‘원’으로서의 명맥이 좀 더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원들이 17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지』까지 명칭이 언급된 반면, 신례원은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호서읍지』에도 그 명칭이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신례원은 원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운영상 폐단이 많아지고 교통시설이 근대화되면서 공공시설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례원은 조선 초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국가에서 지방의 공무수행 관리에 역마 및 숙박 편의 제공과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교통·통신시설이었다.
현재의 신례원도 충청남도 서부 지역의 교통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현재 지명의 ‘원’ 자가 조선시대에 교통 기능을 하였던 곳임을 나타낼 뿐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