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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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음역 | Godae |
영어의미역 | Ancien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여성구 |
[정의]
경기도 안산 지역의 고대 역사에 관한 개관.
[개설]
안산 지역은 서해안의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로서 신석기시대부터 문화 교류가 있었으며,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던 쟁패지였다. 신라는 마지막으로 이곳을 장악하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신라 말기에는 교역을 통해 세력을 키워온 김긍필이 지방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선사 및 초기국가시대의 자취]
경기도 안산에서 인류의 자취는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조개무덤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의 초지동, 대부도의 흘곶·말부흥·구봉이·북동·중부흥, 선감동 탄도, 선재동 사매기·버드러지 등지에서 조개무덤이 조사되었다. 초지동 별망 조개무덤은 BC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철기시대의 김해식(金海式) 토기가 출토되는 2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밑바닥이 둥근 것과 뾰족한 것이 모두 출토되어 뱃길을 이용해 선사시대 사람들의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섬이나 해안가에서 벗어나 구릉지대로 옮겨 생활하였다. 당시의 유적으로는 월피동·양상동·선부동 고인돌을 들 수 있다. 이들 고인돌은 지석 없이 토광을 묘실로 사용한 기반식이고, 뚜껑돌에 성혈(性穴)을 새겨놓았다. 양상동에서는 토광묘 2기도 확인되었다.
[삼국의 쟁패지]
백제가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우기 이전에 안산 지역은 마한의 세력권에 놓여 있었다. 양상동의 토광묘는 마한인들의 자취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추정된다. 토광묘는 옹관묘와 함께 마한의 대표적인 무덤이었다. 2세기 말 백제가 인천 지역을 장악하면서 안산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쳐 5세기 초까지 백제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세기 중반까지 안산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아 장항구현(獐項口縣)[또는 고사야홀차]이 되었다. 그러다가 553년 신라가 백제의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으면서 신라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신라는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 목내동·성곡동·초지동 산성 등이 있으며, 이들 성들은 남양만의 해로 확보 등 해안 방어가 주된 목적이었다.
[장구군과 당성진]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장구군(獐口郡)으로 바뀌고, 한주(漢州)[경기 광주]에 속하였다. 안산 지역은 옹진의 덕적도와 남양의 당은군(唐恩郡)과 함께 서해 바닷길의 요로에 위치하였으며, 초지동의 별망성(別望城)은 이 시기 교역의 중심지였다. 9세기 초 해적이 서해에 출몰하여 신라인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노비로 파는 등 사회적으로 혼란하였다.
이에 828년(흥덕왕 3)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듬해 남양의 당은군을 당성진으로 고쳐 군사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였고, 844년(문성왕 6)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서해안 방어 기지로서 당성진과 혈구진이 중심이 되어, 장구군은 상대적으로 중국 해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소금과 수산물이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뱃길을 이용한 교류가 빈번했던 곳인 만큼 해상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신라 말기 지방 세력의 성장]
신라 말기 안산의 대표적인 지방 세력으로는 안산김씨를 들 수 있다. 안산김씨의 시조는 고려 전기에 활동했던 김긍필이지만, 김긍필의 선조대부터 서해안 일대에서 교역 활동을 통해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김긍필이 인천의 지방 세력 이허겸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긍필의 선조에 대해서는 경순왕과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 사이에서 낳은 김은열이라고 하지만, 의심되는 부분이 많다. 후대에 안산 지역을 신라 왕실과 연결시키려는 의도에서 부회된 것으로 보인다.
성곡동 잿머리 성황당에는 경순왕과 부인인 홍씨, 홍씨의 어머니 안씨 부인의 이야기가 서희와 관련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잿머리 성황당에는 서희 장군, 홍씨 부인, 안씨 부인을 주신으로 모셔 성황제를 올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고려 초 이 지역은 친신라적인 성향이 강했던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