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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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澂 |
영어음역 | Gang Jing |
이칭/별칭 | 언심(彦深),소재(少齋),심재(心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조선 전기 문신이자 서예가.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심(彦深), 호는 소재(少齋)·심재(心齋). 아버지는 강이행(姜利行),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허손(許蓀)의 딸이다.
[활동사항]
강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외삼촌인 우의정 허종(許琮)의 가르침을 받았다.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待敎), 저작, 박사, 부수찬, 수찬, 부교리, 교리 등을 거쳤다.
연산군 때 경연관(經筵官) 재직시 강학을 할 때 말이 유창하고 뜻이 깊어 좌우 신하들이 모두 경청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충청도에 있는 요승(妖僧)이 스스로 사람들의 마비된 수족을 요술로 고친다면서 백성들을 현혹하자 왕명에 따라 그 요승을 문초하여 요망스러운 실정을 밝힌 바 있다. 사헌부장령이 되었다가 다시 직제학, 부제학,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두 품계를 특진하여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왕에게 수렵을 삼가도록 간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전라도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유배지에서 복세암(福世庵)을 뜯어 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잡혀와 옥에 갇혔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강원도관찰사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형조참판이 되었다. 1508년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전주부윤으로 나아갔다가 돌아와 예조참판을 지냈다.
중종이 향산구로(香山九老)와 낙중선현(洛中先賢)의 그림을 그려 병풍을 만들게 하여 대제학 신용개(申用漑)로 하여금 발문을 짓게 하고 강징에게 여러 노신(老臣)들의 이름, 관작, 시문을 쓰도록 하는 한편, 홍문관에서 올린 「명도잠(明道箴)」도 써서 올리도록 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당대의 명필이라 하였고 중종도 가상히 여겨 많은 상품을 하사하였다. 1520년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갔다가 돌아와 1521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명나라 황제가 뛰어난 글씨 솜씨에 감탄하여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
강징은 용모와 성품이 단아하고 몸가짐이 전중(典重)하여 글 쓰는 일을 스스로 즐겼으며, 하루도 책을 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 자제들이 학문에 관하여 물으면 자상하게 깨우쳐 주되 사사로운 주석(註釋)은 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두메진 곳으로 나아가 작은 초가집을 짓고 주변에 꽃나무, 대나무 등을 심어 놓고 소요하면서 한가로이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강징의 필법은 당대 으뜸이었다고 전한다.
[저술 및 작품]
글씨로 정익혜공난종신도비(鄭翼惠公蘭宗神道碑)와 예조참의최한정비(禮曹參議崔漢禎碑)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31번지에 있으며,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1536년(중종 31) 신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대제학 정사용(鄭士龍)이 짓고, 글씨는 이조참판 조상우(趙相禹)가 썼으며, 전자(篆字)는 이조참의 윤덕준(尹德駿)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