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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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叔蕃 |
영어음역 | Yi Sukbeon |
이칭/별칭 | 백응(伯應),운정(芸亭),안성군(安城君),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충숙공(忠肅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명우 |
[정의]
조선 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안성(安城). 자는 백응(伯應), 호는 운정(芸亭). 아버지는 문하시중을 지낸 이경(李坰)이다.
[활동사항]
이숙번은 서울 돈의문 밖[현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에서 태어났으며 1393년(태조 2) 조선왕조 개국 후 첫 번째 치러진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다. 1398년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있을 때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세자 이방석(李芳碩),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지고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400년(정종 2) 박포(朴苞)가 이방간(李芳幹)을 충동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제거하였으며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올랐다. 1402년(태종 2) 새로 설치한 내갑사(內甲士)의 책임자가 되고,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가 되어 안변에서 일어난 조사의(趙思義)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겸중군총제(兼中軍摠制), 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 겸중군도총제(兼中軍都摠制), 동북면절제사, 참찬의정부사, 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3년(태종 13) 병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의정부찬성사가 되었는데, 뒤에 의정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 좌참찬, 찬성이 되었다. 한편 지춘추관사로서 하륜(河崙)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 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수정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1415년(태종 15)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평소 자신의 공을 내세운 방자한 행동으로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며 죄목은 대체로 무례(無禮)와 불충(不忠)이었다. 태종이 붕당(朋黨)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숙번이 윤저(尹柢) 등과 당을 만들어 비방했다거나, 임금이 재차 물어도 이숙번이 고개를 돌린 채 대답을 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그가 역모의 마음을 품었다는 공격을 받았다.
탄핵이 계속되자 태종은 이숙번의 희망에 따라 황해도 연안으로 유배보냈다. 이어 이숙번이 양녕대군에 아첨한 세력과 사통한 사실이 드러나자 그의 공신녹권과 직첩을 회수하고 이어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지를 옮기도록 조치하였다. 그 후 세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으면서 이숙번이 과거의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서울로 불러들이고 한양 밖 가까운 곳에서 살게 함에 따라 이숙번은 안산에서 생활하다가 1440년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산71번지[금화로 353]에 있으며 시흥시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봉분은 네모꼴로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복원되었는데 그 앞 좌우에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만 두 쌍이 있다. 묘역 아래 위치한 묘비는 1959년에 건립한 것이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