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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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應寅 |
영어음역 | Han Eungin |
이칭/별칭 | 춘경(春卿),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충정(忠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응숙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6세손으로 부사직(副司直) 한경남(韓敬男)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현감(縣監)을 지낸 김만일(金萬鎰)의 딸이다. 사헌부감찰을 지낸 한응굉(韓應宏)이 동생이다. 한응인의 후손에서 문과 급제자 37명, 무과 급제자 24명, 정1품 4명, 종1품 5명, 정2품 6명, 종2품 30명, 정3품 46명, 종3품 4명, 정4품 2명, 종4품 13명이 각각 배출되었다.
[활동사항]
한응인(韓應寅)[1554~1614]은 1576년(선조 9) 생원·진사 시험에 모두 급제하고 이듬해 알성시 병과에 8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다. 승정원주서로 일하면서 기사(記事)하는 데 밝고 민첩하였다. 이어 예조좌랑·병조좌랑·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고, 1584년(선조 17)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아버지의 상기(喪期)를 마친 뒤 성균관직장을 지냈다. 1588년 선천군수로 임명되어 이듬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적발한 공으로 호조참의를 거쳐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예조판서에 올라 진주사(陳奏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는 사실을 고하여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했다. 1592년(선조 25) 귀국하는 길에 의주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개성에 이르자 피난길에 오른 왕을 따라 평양으로 갔다가 제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유인 작전에 속아 전군이 붕괴하자, 왕을 뒤따라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전세가 불리하자 요동으로 건너가 원병(援兵)을 청하여 순안사(巡安使) 낙상지(駱尙志)가 군병을 이끌고 와 의주를 함께 지키다가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 중국어에 능해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의 막부(幕府)에서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적이 물러가고 서울이 수복되자 능묘를 보살피고 도처에 뒹구는 시체를 묻어 주었으며, 호적과 지도를 정리하는 등 사회 질서 회복에 힘을 쏟았다. 또 호조판서가 되어 군량미 보급에 힘썼는데, 10만 명의 군사들에게 차질 없이 군수 물자를 제공함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1595년(선조 28)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당시 관내에 있던 많은 명나라 장병과 화합을 도모하는 데 힘썼고, 159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로 가서 정유재란의 원군에 대하여 사례하고 귀국한 뒤 의정부우찬성이 되었다.
1600년(선조 33) 이조판서, 1601년 병조판서, 1607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1608년 선조가 자신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한응인을 비롯하여 한준겸(韓浚謙) 등 7인을 불러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이 된 뒤 사사리[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선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이듬해 향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다시 복구되고 왕은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하며 특명으로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명했다. 한응인은 풍채가 풍만 준수하였고, 기국과 식견이 응중(凝重) 원대하였으며, 남을 접대할 때는 언제나 화기애애하였고,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 및 일가친척 간에 우애가 남달랐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3년간 여막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 소명(召命)했으나 사양하는 상소를 올려 여막에서 상기를 지냈다.
[저술 및 작품]
초서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백졸재유고(百拙齋遺稿)』가 있다.
[묘소]
묘소는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18-6번지에 있다. 신도비와 묘역은 1997년 9월 30일 경기도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고, 영정은 1997년 9월 30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1642년(인조 20) 세운 신도비의 비문은 영의정 김류(金瑬)가 찬하고, 글씨는 셋째 아들인 판서 한인급(韓仁及)이 썼으며, 사헌부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이 전자(篆字)하였다. 한편 1985년 세운 행장비(行狀碑)의 비문은 이정구(李廷龜)가 찬하고, 글씨는 12세손 한준수(韓峻洙)가 썼다. 묘우(廟宇)는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111번지[충정공길 59]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이 되었고, 정여립의 모반을 고변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으며, 1605년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