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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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家煥 |
영어음역 | Yi Gahwan |
이칭/별칭 | 정조(庭藻),정헌(貞軒),금옹(錦翁),금대관(錦帶館),소릉(少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정조(庭藻), 호는 정헌(貞軒)·금옹(錦翁)·금대관(錦帶館)·소릉(少陵). 아버지는 이용휴(李用休), 어머니는 진주유씨(晋州柳氏)로 유헌장(柳憲章)의 딸, 처는 해주정씨(海州鄭氏)로 정운유(鄭運維)의 딸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의 종손(從孫)이며,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의 천주교 영세교인인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활동사항]
이가환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1771년(영조 47) 진사시에 합격했고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후 부정자를 시작으로 예조정랑,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예조정랑 때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비롯해 『갱장록속편(羹墻錄續篇)』, 『대전통편(大典通編)』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84년에 생질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오고 동료학자들이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졌을 때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이벽(李蘗)과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벽으로부터 서학 입문서와 『성년광익(聖年廣益)』 등을 빌려 탐독하고 제자들에게도 전교하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를 계기로 교리 연구를 중단하고 광주부윤으로서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그 뒤 대사성, 개성유수, 형조판서를 지냈고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는데 부임지에서도 천주교인을 탄압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천주교를 연구하다가 1801년(순조 1) 이승훈, 권철신(權哲身) 등과 함께 옥사로 순교하였다.
[학문과 사상]
이가환은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호칭될 만큼 대학자였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하였으며 스스로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정도였다. 정약용은 이가환을 위한 묘비명인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에서 이가환의 학문에 대해 “구경(九經)과 사서(四書)에서부터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詩), 부(賦), 잡문(雜文), 총서(叢書), 패관(稗官), 상역(象譯), 산율(算律)의 학과 우의(牛醫)·마무(馬巫)의 설, 악창(惡瘡)·옹루(癰漏)의 처방(處方)에 이르기까지 문자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한번 물으면 조금도 막힘없이 쏟아놓는데 모두 연구가 깊고 사실을 고증하여 마치 전공한 사람 같으니 물은 자가 매우 놀라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또 문장에도 뛰어나 아버지 이용휴와 아울러 ‘혜환금대지문(惠寰錦帶之文)’으로 칭송될 만큼 조선 후기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금대관집(錦帶館集)』10책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른 저술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시문초(詩文艸)』(4권 4책), 『시문초』(1책), 『시문(詩文)』(2권 1책),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1책), 『금대전책(錦帶殿策)』 등이 있고, 규장각에도 『금대시문초』와 『금대집(錦帶集)』(1책)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