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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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惠派亭 |
영어공식명칭 | Hyepaj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온천동 242-1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건립 시기/일시 | 1863년 이후 1871년 이전 - 혜파정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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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26년 - 혜파정 한식 여관으로 개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온양행궁 자리에 신정관 신축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950년 6월 25일 - 혜파정 6·25전쟁으로 파괴 |
원소재지 | 혜파정 -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 |
성격 | 별장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온천 지역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사용된 건물.
[개설]
조선 전기에 건립된 온양행궁(溫陽行宮)은 여러 국왕들의 온행(溫幸) 장소였다. 조선 후기 숙종·영조·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 세자(思悼世子)]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국왕과 왕세자의 온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헌세자 온행 이후 국왕과 왕실 종친들의 온행은 중단되었으며 온궁의 건물 등이 많이 퇴락되었다. 그 후 고종 때 쇠락해진 건물 대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으로 사용된 혜파정(惠派亭)이 신축되었다.
[위치]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에 있는 온양관광호텔 자리에 있었다.
[변천]
조선 전기부터 임금과 왕족이 수시로 방문하여 번성하였던 온양행궁은 많은 변화를 겪으며 퇴락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온양행궁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1870년(고종 7) 흥선대원군이 온양으로 행차하여 행궁을 찾았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며, 1870년 8월 9일에는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府大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가 온양과 덕산[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행차하였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이처럼 흥선대원군이나 부대부인이 온양에 행차하면서 기존에 퇴락한 건물을 대신하여 별장으로 쓰일 새로운 건물인 혜파정이 신축된 것이다. 이 무렵 고종의 생부로 정치적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은 덕산에 있는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묘소에 성묘를 가면서 온양에 자주 들렸기 때문에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26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朝鮮京南鐵道株式會社)가 온양온천을 인수하면서 신정관(神井館)을 짓고 발간한 안내 책자에서도 흥선대원군이 온궁에 남은 전각의 일부를 보수하여 별장으로 사용한 곳이었다고 하였다. 그중 혜파정은 신정관을 지을 때까지 문과 객실이 남아 한식 여관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혜파정은 광복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다가 6·25전쟁으로 미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다고 한다.
[형태]
고종 초반에 간행된 『온양군지』에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혜파정’이라는 이름의 새로 지은 건물이 기록에서 보인다. 혜파정은 10칸이라고 하였다. 또한 1871년에 발간된 『온양군읍지』에는 혜파정은 14칸으로 이전의 기록보다 규모가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이전에 있었던 전각들이 사용이 불가할 정도로 퇴락하였고, 대신에 혜파정과 함락당(涵樂堂)이 온궁의 중심 건물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