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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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太極同盟 |
이칭/별칭 | 태극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홍구 |
[정의]
6·25 전쟁 당시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있었던 반공 비밀결사.
[설립 목적]
북한 인민군이 아산 지역을 점령하면서 부역·약탈·학살 등을 일삼게 되자, 반공 의식을 갖게 된 온양중학교 학생과 교사들은 인민군의 만행을 방지하기 위해 비밀결사 조직인 태극동맹(太極同盟)을 만들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태극동맹은 온양중학교 학생들과 교사에 의해 조직되었다. 교사 민병교와 이한영, 박노영, 오세기 등 5명의 학생은 북한 인민군의 만행을 저지하고자 비밀결사 조직으로서 태극동맹을 결성하였다. 이후 교사 유진호(柳鎭浩)와 학생 양광석(梁光錫), 이영환(李英煥), 이택윤(李澤潤), 권길옥(權吉玉), 김온경(金溫慶) 등이 합류하면서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교사 유진호와 임택규가 고문을 맡았으며, 학생들은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숙청 대상이 된 자들에게 미리 관련 정보를 줌으로써 피신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그 밖에도 반공 투쟁에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으며, 북한 인민군의 후퇴를 대비하여 무기 탈취 계획도 세웠다. 학생들이 비밀리에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원 대부분이 북한 인민군 가창대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아산 지역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은 자치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하고, 인민군 노래를 보급하기 위해 가창대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마침 온양중학교에는 밴드부가 있었고, 가창대로 편제가 되어 있었다. 밴드부 학생으로서 동맹에 가입한 학생들이 가창대로 활동하면서 비밀리에 반공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 9월에는 송악면에서도 태극동맹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송악 태극동맹은 곧 북한 정치보위부에 발각되어 모두 숙청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온양중학교 학생들이 태극동맹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고문인 교사 유진호, 임택규와 10여 명의 학생이 9월 20일 체포되었다. 이 중 교사 유진호와 양광석, 이영환, 이택윤, 권길옥, 김온경 학생 등이 9월 26일 온양면 실옥리 밭에서 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태극동맹은 UN군이 아산을 되찾은 9월 말 이후 규모가 크게 확대되어 50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북한 인민군과 좌익 자치 세력이 물러나면서 치안 등의 공백이 생기자 온양경찰서와 각 지서의 업무가 복귀되기 전까지 자체적으로 치안 업무에 참여하였다. 온양경찰서가 공식적으로 업무를 재개하자 태극동맹은 치안을 경찰에 넘기고, 학도호국단에 편입하여 지속적으로 반공 활동을 전개하였다.
[현황]
태극동맹의 반공 활동은 기념물의 설치로 이어졌다. 당시 온양중학교 교장인 이성규는 처형당한 학생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온천리 교정 한편에 비를 세우고 ‘장충단(奬忠壇)’이라 명명하였다. 1979년 온양중학교가 온양시 용화동[지금의 아산시 용화동]으로 교사를 이전하면서 장충단 역시 옮겨졌다.
[의의와 평가]
태극동맹은 6·25전쟁 중 활동했던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대표적인 반공 단체이자 비밀결사 단체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태극동맹의 반공 활동은 아산 지역 주민들이 북한 인민군의 만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아산 수복 이후의 치안 유지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학생으로서 전쟁 중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활동은 후배 학생들은 물론 아산 시민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