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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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弘亮 |
영어공식명칭 | Im Hongryang |
이칭/별칭 | 사인(士寅),폐추(敞帚)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634년 12월 6일 - 임홍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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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임홍량 진사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662년 - 임홍량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64년 - 임홍량 봉상시봉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67년 - 임홍량 양현고직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임홍량 제주목사 임홍망과 사촌지간이라 하여 상피로 개차됨 |
활동 시기/일시 | 1691년 - 임홍량 진주목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98년 - 임홍량 여주목사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707년 8월 9일 - 임홍량 사망 |
거주|이주지 |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
수학|강학지 | 강학지 - 충청남도 아산시 |
묘소|단소 | 임홍량 묘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석두리 두무실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풍천 |
대표 관직|경력 | 진주목사|여주목사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에서 활동한 문인.
[개설]
임홍량(任弘亮)[1634~1707]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성리학을 존숭하고 따랐으며, 신창향교가 이건한 후 상량문을 지었다. 임홍량의 「신창향교이건상량문(新昌鄕校移建上樑文)」이 문집 『폐추유고(敝帚遺稿)』에 전한다. 또한 아산의 사마소(司馬所)[지방의 생원·진사들이 각 고을에 설립한 자체 협의기구]를 건립하였던 사실이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에 기록되어 있다.
[가계]
임홍량의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사인(士寅), 호는 폐추(敞帚)이다.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임준(任晙), 어머니는 능주구씨(陵州具氏)로 구강(具剛)의 딸이다. 사예(司藝) 임희지(任羲之)의 손자이다. 첫 번째 부인은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자(李滋)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고령박씨(高靈朴氏) 박후문(朴後文)의 딸이다. 아들은 정랑(正郞) 임원(任謜)이다.
[활동 사항]
임홍량이 1657년(효종 8) 진사시에 입격(入格)하였을 때에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거주지가 아산으로 되어 있었고, 아버지 임준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을 지낸 상태였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64년(현종 5) 봉상시봉사(奉常寺奉事), 1667년(현종 8) 양현고직장(養賢庫直長)을 거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예조좌랑, 병조좌랑, 전라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0년(숙종 6)에는 제주목사 임홍망(任弘望)과 사촌지간이라 하여 상피(相避)[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는 같은 관청에 재임하거나 업무상 서로 혐의(嫌疑)가 있는 자리에 재직하는 것을 피하는 일]로 개차(改差)[관직을 바꿈]되었다. 그 후 풍기군수, 평산부사, 통천군수, 순천부사 등을 지내고, 1691년(숙종 17) 진주목사가 되었다. 오위장(五衛將), 의주(義州) 영위사(迎慰使)를 역임한 후 1698년(숙종 24) 여주목사가 되었다. 1699년(숙종 25)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의하면, 모든 도에서 지난해의 환자곡(還子穀)을 거둔 실적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목사 임홍량이 상납하지 않았으니 처벌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따라 교체나 추고(推考)[벼슬아치의 허물을 추문(推問)하여 고찰하던 일] 대신 곤장을 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후로 다른 관직을 지내지 않은 채 1707년(숙종 33)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사우(祠宇)와 관련하여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공의 덕택이니 백성의 교화를 위하여 사우를 짓는다."는 내용의 기문도 남겼다. 저서로 『폐추유고』 4권이 있다.
[묘소]
임홍량의 문집에는 임홍량 묘가 ‘아산 두모(牙山斗毛)’라 표기되어 있는데, 현재 아산시 염치읍 석두리 두무실[두모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