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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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효경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일대 주민들이 예전부터 입던 옷의 종류, 의례용 옷 제작, 착용, 보관 등에 관한 생활 문화.
[개설]
보령시 주민들은 1940년대 이전까지는 한복 중심의 복식을 입었다. 직접 삼베를 생산해 옷을 지었고, 광목을 사다가 물감을 들여 아이들의 옷을 만들어 입혔다.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서구적 요소가 유입되면서 서구식 복장 착용이 확산되었다. 점차 양복 착용이 확산되면서 한복은 혼례, 상례, 제례 등의 의례를 행할 때에 착용하는 예복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1960년대 이전까지 착용했던 옷은 대부분 한복이다. 6·25전쟁 이후 기성복이 보급되었으나 옷 가게는 매우 드물었다. 이후 양장점, 양복점 등의 가게들이 도심을 중심으로 하나 둘 생겨났고, 1980년대 이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서울 남대문 시장의 기성복을 떼다 파는 옷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의생활이 전면적으로 변화되었다.
[특징]
의례복과 일상복을 중심으로 보령 시민의 의생활 문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갓난아이의 배냇저고리는 융으로 만들었는데, 깃은 달지 않고, 옷고름 대신 실을 매달아 아이 몸통을 둘러 묶었다. 아이 기저귓감은 별도로 새 천을 사서 사용하기보다 어른들의 헌 옷을 뜯어서 사용하였다. 헌옷은 천이 낡았지만 부드러워 오히려 사용하기에 편리하였다. 포대기는 무명이나 광목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옷감이 부족하면 이불을 두르기도 하였다. 첫 아들을 낳으면 친정에서 축하의 의미로 포대기를 선물해 주었다. 아이가 5살이 될 때까지는 될 수 있으면 고운 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혔는데, 주로 물감을 사다가 집에서 직접 물을 들여 입혔다. 5살 이후의 아이들은 흰색이나 검정색 옷으로 지어 입혔다. 어린아이는 색색으로 옷을 지어 입혀야 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성인들은 평소에는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생활하였다. 대부분 무명으로 한복을 지어 입었지만, 간혹 멋을 부릴 때는 윳동[본견]으로 지어 입었다. 혼인하는 신랑과 신부의 예복은 마을마다 장만해 두고 빌려 입었다. 혼인하러 가는 신랑은 자신이 평소 입던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두루마기만 걸치고 간다. 혼례식장에 도착해서 동네에 보관된 혼례복으로 갈아입는다. 신부도 혼례복은 동네에서 마련해 둔 공용 원삼과 족두리를 입지만, 속에 입는 한복은 새것으로 마련한다. 시집가면 집안 어른과 아이들 옷을 지어야 했기에 자신의 옷은 새로 마련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에 시집가는 딸에게 새 옷 한 벌을 지어 입히는데, 보통 빨강 치마에 파랑 저고리를 지어준다. 혼인 적령기의 딸이 있는 집에서는 미리 옷감을 준비해 두었다가 새 옷 몇 벌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새로 지은 옷은 세탁한 후 밤에 마당에 널어 이슬을 맞힌 후 화톳불을 이용해 다림질과 인두질을 해 곱게 다듬어 둔다.
부모님이 환갑이 지나면 오래 사시라는 뜻에서 미리 윤달에 수의를 짓는다. 최근에는 중국산 삼베의 수입으로 수의의 재질을 믿을 수 없게 되었기에 질 좋은 삼베를 구할 수 있다면 때에 무관하게 장만한다. 수의는 솜씨 좋은 이를 불러 짓는데, 품앗이로 작업하므로 품삯은 생략한다. 산 사람이 입는 옷과 달리 수의를 지을 때는 실의 매듭을 짓지 않는다. 저승길을 가는 망자에게 매듭처럼 맺히는 일이 많아 좋지 않다고 여기는 유감주술적인 사고이다. 수의는 함에 넣어서 농장 안에 보관하며, 간혹 꺼내서 바람을 쏘여 말린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초상이 발생하면 수의는 당일에 여러 명이 손을 보태어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