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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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承健 |
이칭/별칭 | 자이(子以),성은(星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609년 - 박승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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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0년 - 박승건 진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50년 - 박승건 증광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박승건 정·사서·직강·예조정랑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61년 - 박승건 지평·전라도도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62년 - 박승건 장령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63년 - 박승건 청나라에 가다가 병으로 귀국 |
활동 시기/일시 | 1664년 - 박승건 상주목사로 재직 |
몰년 시기/일시 | 1667년 4월 29일 - 박승건 사망 |
묘소|단소 | 박승건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
사당|배향지 | 정려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도화담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밀양 |
대표 관직 | 상주목사 |
[정의]
효자 정려를 받은 조선 후기 문신.
[개설]
박승건(朴承健)[1609~1667]의 자는 자이(子以)이고, 호는 성은(星隱)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효자 정려를 받았다. 아들 박세주가 충청남도 보령에 정착하여 밀양 박씨 입향조가 되었다.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증조할아버지는판서 박충원(朴忠元), 할아버지는 박호현(朴好賢), 아버지는 박안행(朴安行)이다. 어머니 한양 조씨는 조흥무(趙興武)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박승건은 1630년 둘째 형 박승휴(朴承休)와 함께 진사시에 입격하였는데, 이때 거주지는 한성이었다. 165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 權知正字)로 시작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거쳐, 1652년에 정언(正言)·사서(司書)·직강(直講)·예조정랑을 지냈다. 1653년 용안현감, 1659년 다시 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이익(李翊)[1629~1690]을 논핵(論劾)하였다가 체차(遞差)[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을 이르던 말]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사간원 헌납(獻納) 민유중(閔維重)[1630~1687]이 나서서 이를 막았다.
1661년에는 지평(持平)·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를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장령(掌令)이 되었다. 1663년에는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올라,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 연경으로 떠났다가 지병으로 인해 도중에 돌아왔으며, 사행(使行)에 결원이 생기게 하였다는 이유로 추고(推考)되었다. 이후 수차례 청나라 사신을 자원했지만, 발탁되지 못하였다. 1664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한 공이 있어 자급(資級)이 올랐다.
박승건은 성품이 순박하고 어려서부터 마음이 착하여 여섯 살 때에 개미도 밟지 않았고, 아홉 살 때에는 병든 어머니를 위해 하늘에 정성껏 기도하였다. 이웃집 복숭아가 담을 넘어 땅에 떨어져도 욕심내지 않았으며, 부모의 말을 공경하여 조금의 어긋남도 없었다. 아버지의 병중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회생시켰다. 박승건의 아들 박세주(朴世冑) 또한 효성이 있어 부자가 모두 효자 정려를 받았다.
아들 박세주가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에 입향하면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고, 박승건의 효자 정려 또한 보령으로 옮겨와 박세주의 효자 정려와 함께 현재의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도화담리에 세웠다. 박승건의 묘소와 묘비도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로 이장되었다.
[묘소]
박승건의 묘소와 묘비는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도화담리에 효자 정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