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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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採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58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65년 - 이채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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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이채우 군자금 모집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 이채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이채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군 남포면 월전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군자금 모집 활동 |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채우(李採雨)[1865~1936]는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출신으로 1919년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활동 사항]
1919년 4월 당시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 무장한 유동열(柳東說)[1879~1950]은 ‘대한민국 지린 주재 군정사(軍政司)’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청년을 규합하여 군인을 양성하고 있었다. 1919년 7월 중순 이채우의 집에 김영순(金永淳)과 김찬규(金燦奎)가 찾아와 지린성에서의 유동열 계획을 알리고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였다.
이채우는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군정사독판(軍政司督辦) 유동열 명의를 빌려 ‘군령(軍令)’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협조 요청문을 작성하였다. “지린 군정사는 노령과 서북간도에서 청년을 소집하여 편성한 군이 이미 20만에 달했는데, 군자금의 결핍으로 일의 차질이 많으므로 아무개를 조선 내로 특파함으로써 힘을 다하여 기부하고 나아가 연납하는 자는 공로를 기록하고 거절하여 납부하지 않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이 협조 요청문을 약 30매가량 인쇄하였다. 인쇄물의 일부는 김영순, 홍순갑(洪淳甲)[1896~1929]에게 전달하여 신의주로 보내고, 나머지는 권총과 함께 8월 17일 이시우(李時雨)와 이증로(李曾魯)에게 전달하여 전라북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서 이증로가 검거되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이채우도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채우는 1921년 2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사문서 위조죄 및 정치범 처벌령 위반과 강도 예비 등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