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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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奎錫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주교리 11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58년 8월 1일 - 최규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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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최규석, 3·1운동 독립선언서 배포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23년 6월 24일 - 최규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최규석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주교리 119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1운동 독립선언서 배포 활동 |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규석(崔奎錫)[1858~1923]은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출신으로 1919년 충청남도 부여면의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충청남도 지역 3.1운동 전개]
최규석이 참여한 부여 지역 내 3·1운동은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된 후 이튿날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부여는 충청남도의 다른 지역보다 만세운동이 이른 시기에 전개될 수 있었다.
부여 지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천도교 조직을 통해서였다.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1919년 1월 15일부터 49일간 전국의 교구장들을 서울로 불러 특별기도회를 개최하였다. 교구장들은 서울에서 교구 상황을 보고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을 기획하였다. 기도회에 박용화(朴容和)[1881~1953]와 최용철(崔容澈)[1885~1949] 등 부여의 천도교 임원들도 참여하였다고 전해진다.
3월 1일 인종익(印宗益)[1870~?]이 독립선언서 4천 매를 가지고 철도편으로 전주에 도착하였고, 전주 천도교 대교구실에서 김진옥(金振玉)에게, 철도를 이용해 익산대교구장 이중열(李仲悅)에게, 익산대교구에서 다시 전주와 옥구에 전달되었고, 함열교구 민영순(閔泳淳)이 논산교구로 이동하여 부여와 논산 지역에 배포를 하였던 것이다.
[활동 사항]
최규석은 독립선언서를 1919년 3월 2일 충청남도 부여면 구교리와 은산면 일대에 배포하였다. 최규석은 이날 오후 9시 천도교 교구실에서 김종석(金鍾錫)[1874~1936], 황우열(黃宇烈)[1864~?], 박성요(朴性堯)[1893~1932]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교부 방법을 논의하고 각각 배포 책임을 분담하였다.
최규석은 김종석에게 독립선언서 10매를 교부받아 늦은 밤에 교구실을 출발하여 부여면 구교리로부터 은산면에 이르는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최규석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