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259
한자 磻溪隨錄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영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652년연표보기 - 『반계수록』 저술 시작
저술 시기/일시 1670년연표보기 - 『반계수록』 저술 종료
간행 시기/일시 1760년연표보기 - 『반계수록』 간행[1760]
간행 시기/일시 1770년 - 『반계수록』 간행[1770]
간행 시기/일시 1954년 - 『반계수록』 간행[1954 영인]
간행 시기/일시 1974년 - 『반계수록』 간행[1974 영인]
간행처 충남대학교 -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99[궁동 220]
성격 문집
저자 유형원(柳馨遠)
간행자 경상 감영[이미(李瀰)]
권책 26권 13책
어미 상하향이엽화문어미
권수제 수록권지일(隨錄卷之一)
판심제 수록권지일(隨錄卷之一)

[정의]

부안에 은거한 조선 후기 학자 유형원이 국가 운영과 통치 제도에 관한 개혁안을 중심으로 저술한 정책서.

[저자]

유형원(柳馨遠)은 조선 후기 학자로 1622년(광해군 14)에 서울 정릉에서 태어나 1673년(현종 14)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임진왜란을 치른 뒤 사회가 혼란스럽고 양반 사회의 모순이 표면화되어 가던 17세기 초에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두 살 때 아버지 유흠(柳𢡮)이 유몽인(柳夢寅)의 옥에 연좌되어 돌아가시고, 5세 때부터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5세가 되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피난했고, 다음 해 지금의 양평인 지평 화곡리로 이사했다가 여주 백양동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다. 20대에 할머니의 상과 어머니의 상을 당했으며, 1651년(효종 2) 30세 때에 할아버지의 상을 당한 뒤 나이 32세 때에 유형원은 9대조 유관(柳寬)의 사패지(賜牌地)[왕이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땅]가 있는 부안 우반동(愚磻洞)[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내려와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20여 년간 부안 우반동에서 반계서당(磻溪書堂)을 짓고 제자를 양성하며 한편으로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유형원은 문예·사장(詞章)·병법·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산학(算學)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를 시작으로 역사책 『동국사강목조례(東國史綱目條例)』, 어학에 관한 『정음지남(正音指南)』, 『동국문초(東國文抄)』, 병법서 『기효신서절요(紀效新書節要)』와 『무경사서초(武經四書抄)』, 도가서인 『참동계초(參同契抄)』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49세에는 19년의 집필 과정을 거쳐 실학(實學)을 학문으로 정립하고, 중농 사상(重農思想)에 기반을 둔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완성하였다. 현재에는 『반계수록』과 『동국사강목조례』, 『동국여지지』 등이 남아 있다. 유형원의 학문은 남인 실학자의 계보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대체로 이익(李瀷)[1681~1763]을 거쳐 안정복(安鼎福)[1712~1791], 정약용(丁若鏞)[1762~1836]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형원은 사후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 동림마을에 있던 동림서원(東林書院)에 배향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반계수록』유형원부안 우반동에 우거하면서 그의 나이 31세 때인 1652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년의 세월이라는 긴 집필 과정을 거쳐 그의 나이 49세인 1670년(현종 11)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반계수록』에 보이는 진보적이고 이상적인 사상은 당시 조선 사회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형원이 제시한 사회 개혁론은 실학 학풍이 피어나던 18세기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되고 이익과 그의 제자 안정복 등에 의해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78년(숙종 4) 유형원과 교분이 깊었던 배상유(裵尙瑜)[1610~1686]가 상소문을 올려 『반계수록』에서 제시한 정책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1741년(영조 17) 영조 때에는 승지 양득중(梁得中)[1665~1742]이 영조에게 『반계수록』을 강론할 것을 청하며 이 책을 추천하였고, 좌참찬 권적(權樀)과 예문관 대제학 홍계희(洪啓禧)가 『반계수록』의 간행을 청하였다. 이에 영조는 1750년 『반계수록』의 간행을 허락하고, 1760년에 『반계수록』을 경제에 관련한 탁월한 저술로 인정하여 예문관에서 3부를 인쇄 간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770년(영조 46) 왕명에 의해 경상 감영에서 경상도관찰사 이미(李瀰)의 주관 하에 목판본 『반계수록』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특별히 정조는 『반계수록』에 주목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학자들의 성제(城制)에 관한 이론을 검토한 끝에 수원에 성지(城池)를 건축해야 한다는 내용에 관심을 가지면서 『반계수록』을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바탕으로 여겼다.

『반계수록』은 1954년 동국문화사에서 영인되었고 이 영인본에 부록 자료를 추가해 1974년 경인문화사에서 다시 영인되었다. 『반계수록』의 맨 앞에는 경상도관찰사로서 출판의 일을 맡았던 이미가 1770년에 쓴 서문과 후학 오광운(吳光運)[1689~1745]이 1737년에 쓴 서문이 붙어 있다. 책 이름인 『반계수록』에서 ‘반계’는 유형원의 호이고, ‘수록(隨錄)’은 책을 읽다가 수시로 베껴 둔 것이라는 뜻으로 저자의 겸사를 나타내는 말이다.

[형태/서지]

26권 13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판본이다. 사주 쌍변이며, 10행 19자이다. 어미(魚尾)[책을 펼쳤을 때 중앙에 물고기 꼬리 문양의 접지표]는 상하향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모두 ‘수록권지일(隨錄卷之一)’이다. 고서본은 40여 질이 현전하고 있다. 한장경(韓長庚)의 번역본이 충남대학교에서 4책으로 출판되었고[1962~1967] 북한사회과학원에서도 완역이 나왔다.

[구성/내용]

『반계수록』은 권1~권26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형원은 개혁안의 주제로 전제(田制), 교선(敎選), 임관(任官), 직관(職官), 녹제(祿制), 병제(兵制)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각 주제별로 ‘고설(攷說)’을 배치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례를 모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권1·2는 전제(田制), 권3·4는 전제후록(田制後錄), 권5·6은 전제고설(田制攷說), 권7·8은 전제후록고설(田制後錄攷說), 권9·10은 교선지제(敎選之制), 권11·12는 교선고설(敎選攷說), 권13은 임관지제(任官之制), 권14는 임관고설(任官攷說)로 구성되었다.

권15·16은 직관지제(職官之制), 권17·18은 직관고설(職官攷說), 권19는 녹제(祿制), 권20은 녹제고설(祿制攷說), 권21은 병제(兵制), 권22는 병제후록(兵制後錄), 권23은 병제고설(兵制攷說), 권24는 병제후록고설(兵制後錄攷說), 권25·26은 속편(續篇)과 유형원 자신이 쓴 발문인 「서수록후(書隨錄後)」가 실려 있다. 이어 말미에 부록과 보유 편이 있는데, 보유 편에는 군현제(郡縣制)에 대한 내용과 보유발(補遺跋)이 붙어 있다.

[의의와 평가]

『반계수록』은 집필이 완성된 100년 후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서적으로, 조선 실학의 비조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에는 유형원의 사상과 이념, 이상 국가 건설에 대한 구상이 실려 있는데, 토지 제도 및 농업, 교육 문제에 대한 다양한 개혁안이 제시되고 있다. 특히 유형원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토지 제도 개혁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토지를 국가가 공유하고 신분에 따라 재분배하자는 균전제를 주장한 것이다. 그 밖에도 병농 일치의 군사 제도인 부병제(府兵制) 실시를 강조하였고, 과거제 폐지와 공거제(貢擧制) 실시, 신분제 및 직업 세습제 개혁, 학제와 관료제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 과감한 개혁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유형원의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은 물론 후학들의 학풍 조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20여 년간 『반계수록』 집필의 산실이 된 부안 우반동은 조선 후기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나타난 실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