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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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夢鶴 |
영어공식명칭 | Lee Mongha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행묵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이몽학 민란 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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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6년 - 이몽학 사망 |
활동지 | 홍산 -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
성격 | 반란자 |
성별 | 남성 |
본관 | 전주(全州) |
[정의]
조선 후기 부여 지역에서 민란을 일으킨 반란군 수장.
[가계]
이몽학(李夢鶴)[?~1596]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서울에 살았으나 품행이 좋지 않아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를 전전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이몽학이 본래 흉하고 교활한 무리로서 처음에 편비(偏裨)가 되어 종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활동 사항]
이몽학은 전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군량미를 모으러 다니던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과 도천사(道泉寺) 승려 능운(凌雲), 김경창(金慶昌)·이귀(李龜)·장후재(張後載) 등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였다. 이몽학과 한현 등은 홍산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를 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마치 의병을 일으키는 것처럼 가장하였고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반란군을 규합하였다.
도천사의 승려들과 사노(私奴)를 포함하여 대략 1,000여 명에 가까운 병력을 확보한 이몽학은 1596년(선조 29) 7월 밤 어둠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하여 홍산현감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았다. 이어서 임천군을 습격하여 임천군수 박진국(朴振國)을 사로잡은 뒤 정산현, 청양현, 대흥현을 함락하였다. 고을 수령들은 항복하거나 도주하였고 아전과 백성들은 거의 모두 반군에 가세하여 반란 세력의 무리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
이몽학의 반란 세력은 홍주성을 포위하였으나, 충청도병마절도사 이시언(李時言)과 순무어사 이시발(李時發)이 관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서자 홍주성 함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덕산(德山)으로 후퇴하였다. 반란군이 덕산으로 후퇴하는 도중 도망자가 속출하였고, 전주판관 윤계(尹誡)의 계략으로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널리 알리자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昌)과 임억명(林億明) 등이 이몽학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바쳤다.
이때 반란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던 한현은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 등에게 패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몽학의 시신은 서울의 시전 거리에 효수되었고, 홍산에 있던 이몽학의 가옥은 파가(破家)되었으며 홍산현도 혁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