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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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道 三宜亭- 題芳林 |
이칭/별칭 | 삼의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세도로439번길 82-12[반조원리 49-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민균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9세기 초 - 삼의당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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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 시기/일시 | 1909년 - 삼의정 소실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7년 12월 28일 - 세도 삼의정터 및 제방림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94호 지정 |
현 소재지 | 세도 삼의정터 및 제방림 -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세도로439번길 82-12[반조원리 49-1] |
원소재지 | 세도 삼의정터 및 제방림 -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세도로439번길 82-12[반조원리 49-1] |
성격 | 정자터 |
관련 인물 | 정선|윤광안|강필효|이유원 |
크기(높이,길이,둘레) | 200m[제방림] |
관리자 | 부여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94호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 금강 변에 있는 정자 터와 제방림.
[개설]
삼의정(三宜亭)은 조선 후기 학자 윤광안(尹光顔)[1757~1815]이 만년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금강 변에 세운 정자이다. 삼의당(三宜堂)이라고도 부른다. 삼의정 양쪽으로는 여러 종의 나무로 이루어진 제방림이 이어져 있다. 강필효(姜必孝)[1764~1848]가 남긴 『해은선생유고(海隱先生遺稿)』에 따르면, ‘삼의당’이라는 이름은 ‘농사 짓기에 적합하고[宜於耕], 낚시질에 적합하고[宜於釣], 독서에 적합한 곳[宜於讀]’이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금강 변은 풍광이 수려하여 삼의당이 건립되기 전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삼의정터를 배경으로 「임청고암(林川鼓岩)」이라는 제목의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삼의정이 건립된 후에도 윤광안과 교유하였던 문인이 방문하여 기문을 남기고는 하였다. 강필효는 1814년 방문하여 『삼의당기(三宜堂記)』를 남겼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나중에 삼의정을 방문하여 『삼의정기(三宜亭記)』를 남기기도 하였다. 삼의정은 1909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세도 삼의정터 및 제방림은 2007년 12월 28일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94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윤광안은 재임 시절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철거한 일 때문에 1808년 이우재(李愚在)의 탄핵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몰려 함경도 무산부에 유배당하였다. 윤광안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금강 변에 살면서 후진 양성을 위하여 삼의정을 건립하였다. 제방림은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200년 전 조성되었다고 한다.
[위치]
세도 삼의정터 및 제방림은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세도로439번길 82-12[반조원리 49-1] 금강 변에 있다. 세도 삼의정터 양쪽으로 200m 정도 제방림이 이어져 있다.
[형태]
삼의정은 본래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후 터에 8개의 주춧돌만 남아 있다. 세도 삼의당터 부근 강변에는 90여 그루의 버드나무와 느티나무, 팽나무, 물푸레나무가 제방림을 이루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세도 삼의정터 및 제방림은 후학을 양성하는 공간이며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 또한 관광 자원으로 활용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