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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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府 |
분야 | 역사/근현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윤상 |
제정 시기/일시 | 1910년 - 창원부 마산부로 개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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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시기/일시 | 1914년 - 마산부와 창원군 분리 |
폐지 시기/일시 | 1949년 8월 - 마산부 마산시로 개편 |
관할 지역 | 마산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암리|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석전동 |
[정의]
1910년부터 해방 전까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개설]
조선 시대의 마산은 창원부 혹은 창원군에 속한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1760년(영조 36)에 마산포에 조창(漕倉)이 설치되고 세곡(稅穀) 운송에 따른 상품 유통량이 늘어나면서 마산포는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김해의 칠성포(七星浦)와 더불어 경상도의 유력한 포구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함경도 지역까지 상품 유통로가 확장되면서 원산포에서 집하된 북어가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마산포를 경유하여 충청도의 은진 강경포로 유통되는 등 마산포는 경상도 지역만이 아니라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전국 해상 유통의 중계 포구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각종 조세를 화폐로 납부하는 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조운이 폐지되면서 세곡 운송을 기반으로 하여 주요 포구로 성장하고 있었던 마산포는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곧 이은 1899년의 마산포 개항은 마산포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였다. 마산포의 개항에 따라 외국인들의 조계가 설정된 것은 물론이고 개항장 사무를 담당하는 감리서를 비롯하여 세관, 우체사, 전보사, 재판소, 각국 영사관 등 근대적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더욱이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같은 해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본인들의 마산 이주가 급증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마산은 행정 구역상 창원부에 속해 있었다.
[변천]
1906년 칠원군의 구산면과 김해군의 대산면이 창원부로 이속되었고, 1908년에는 진해군[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진북면]과 웅천군[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이 창원부에 합병되어, 창원부는 현재의 통합 창원시 지역을 모두 포괄하는 넓은 행정 구역을 갖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창원부 전체가 마산부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1914년에는 부·군제의 실시 등 전면적인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한 시가지 일부인 당시 마산부 외서면 대부분과 신마산의 각국 공동 조계지만 마산부로 남고 그 주변 지역은 모두 창원군으로 분리하였다. 당시 마산의 인구는 23,000여 명에 불과하여 부(府)의 기준에 못 미쳤지만 마산포 일대의 병참 기지로서의 중요성과 일본인 거주자가 많다는 점 들을 고려하여 부로 편제한 것이다.
한편 1910년 마산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그 전의 마산 이사청 건물을 마산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1936년 10월 청사를 새로 지어서 이전하였고, 1942년에는 창원군의 창원면 봉암리, 내서면 교방리·회원리·산호리·석전리, 구산면 가포리 등이 마산부에 편입되어 관할구역이 확대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8월 지방 자치법에 의해 마산부는 마산시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