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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363
한자 昌原南山遺蹟
영어의미역 Archeological Site of Namsan Mountain in Changw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팔용로 494-37[서상동 산83-1]
시대 선사/청동기,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성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7년 12월 31일연표보기 - 창원 남산 유적 경상남도 기념물 제20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창원 남산 유적 경상남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남산 유적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팔용로 494-37[서상동 산 83-1]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서상동에 있는 청동기 시대 취락과 원삼국 시대 취락 및 조개더미 유적.

[개설]

청동기 시대가 되면 집약적인 농경 사회가 형성되고 사회적 위계화가 진행되어 취락의 기능적인 분화와 위계화도 진행된다. 또한 이전에 볼 수 없던 대규모 토목 공사를 통해 농경지를 개발하고 거대한 환호와 고인돌과 같은 기념물이 축조된다. 보통 청동기 시대 취락은 강안 충적지와 구릉에 입지하는데, 창원 남산 유적은 대규모 환호 시설을 갖춘 구릉 정상부의 취락으로, 환호는 일종의 방어 시설로 축조되었다고 추측된다.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 및 원삼국 시대에도 높은 구릉 정상부에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해안에서는 추락 주변에서 조개더미가 형성되기도 한다. 창원 남산 유적은 청동기 시대 취락이 폐기되고 400년 이상이 지난 후 원삼국 시대의 고지성 취락과 조개더미가 형성된 유적이다.

창원 남산 유적은 1997년에 창원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져 유적의 전모가 밝혀졌는데, 조사 결과 유적의 성격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청동기시대의 환호(環濠)와 취락, 그리고 소규모 조개더미, 둘째, 원삼국시대의 취락과 소규모 도랑(溝), 폐기장과 조개더미, 셋째, 중세와 근세의 건물지와 구덩이, 도랑(溝) 등이 확인되었다.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0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창원 남산 유적남해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교통로에 위치한 높이 100m 정도의 독립 구릉 정상부에 입지하고 있다. 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5~10㎞ 내에는 교통로를 따라 초대형 제단을 가진 덕천리(德川里) 지석묘군, 용잠 지석묘군, 외동 지석묘군, 상남동 지석묘군 등이 있어 당시 청동기시대 사회를 재구성해 보는 데 매우 중요하다.

[형태]

창원 남산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취락의 한가운데, 즉 구릉 정상부에서 한 칸짜리 지상 건물지 외에는 주거 시설이나 저장 구덩 등이 발견되지 않아 취락의 중심부는 광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상 건물지는 전망이 좋은 데 입지한 것으로 미루어 망루일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 시대 취락과 동 시기에 형성된 조개더미가 유적의 동쪽 사면에 약 50m 정도 거리를 두고 형성되어 있다.

주거지는 평면 형태에 따라 원형, 장방형, 방형으로 나눌 수 있다. 원형은 이른 바 송국리식 주거지로, 주거지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양단에 매우 깊은 기둥 구멍을 배치한 형태이다. 장방형 주거지는 규모가 비교적 큰 편에 속하여 58호 집터의 경우 길이가 8m 정도 되는 것도 있으며, 집터 안에 한두 개씩의 노지를 가지고 있다.

58호 장방형 집터에서는 직경 40㎝ 정도의 깊은 구덩이를 파서 큰 저장용 항아리를 뭍은 시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방형 주거지들은 한 변이 4m 미만인 소형이고, 노지는 갖추었지만 그 외 특별한 시설이나 기둥 구멍은 없다. 장방형이나 방형 집터에는 배수 시설로 추측되는 벽도랑이 집터 가장자리를 따라 돌아가는데, 원형 주거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설이다.

집의 자리와 저장 구덩, 지상 건물지, 도랑 등으로 구성된 마을 전체는 타원형의 환호가 둘러싸고 있다. 규모가 큰 주환호가 가장 안쪽으로 돌아가고 그 바깥쪽에 2중, 혹은 3중으로 규모가 보다 작은 외환호들이 돌려져 있다. 주환호는 구릉을 완전히 감싸도록 구축되어 있으나 동쪽으로 뻗은 지맥을 향해서는 폭 4m로 열려 있어 환호 취락의 출입구로 삼은 것 같다.

주환호는 매몰된 토사를 퍼내면서 수차례 개축된 바 있으며, 단면 형태는 V자형을 기본으로 하지만 재굴착 때마다 바닥 단면을 다르게 파서 凹자형, 반원형, V자형 등 다양하다. 환호의 상부 폭은 가장 넓은 지점이 10m, 가장 좁은 지점이 3.6m이며, 깊이는 가장 깊은 곳이 4.2m, 가장 얕은 곳이 1.8m 정도 된다. 주환호는 기능이 상실됨에 따라 토기와 석기, 동물의 유해와 조개껍데기 등이 고의로 폐기되면서 매립되었다.

원삼국 시대 유구는 주거지, 저장 구덩, 구덩 유구, 폐기장, 환구, 조개더미, 유물 포함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구릉의 정상부와 그에 가까운 사면에 분포한다. 원삼국 시대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가 삭박되면서 많이 유실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구릉 정상부에서 남쪽 사면에 집중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동쪽 사면에는 수많은 폐기장 구덩이와 조개더미가 형성되어 있다. 원삼국 시대에도 청동기 시대의 규모와는 비교될 수 없지만 소규모 환구가 축조되어 있다.

창원 남산 유적에서는 민무늬 토기와 많은 양의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거의 대부분 환호에 폐기된 유물들이다. 민무늬 토기의 경우 저장용 항아리와 독, 그리고 바리 등이 대부분이고, 붉은 간토기 계통의 작은 단지와 대각 달린 토기들이 많은 양 출토되었다. 석기 중에는 농경, 혹은 벌목 및 목재 가공용 도구들이 주종을 이룬다. 반달돌칼, 돌낫, 돌도끼, 돌끌, 주상석부, 갈돌과 갈판, 숫돌 등이 많이 출토되었고 간돌검이나 돌화살촉 같은 무기형 석기들도 다량으로 나왔다.

[의의와 평가]

창원 남산 유적의 청동기 시대 취락에서 무엇보다도 주목을 끄는 것은 거대한 규모로 축조된 환호 시설이다. 창원 남산 유적의 환호는 청동기 시대 환호 중 가장 큰 규모로, 토목 공사로 축조된 것으로서 남산 취락에 거주하던 인구수로는 건설이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주변 취락들에서 노동력이 대거 징발되었을 것이다.

4~5채의 주거지가 있는 취락을 거대한 환호가 둘러싸고 있는 점, 망루와 같은 유구가 축조된 점, 구릉 정상부를 광장으로 남겨둔 점, 그리고 붉은 간토기와 간돌검과 같은 의례용 물품이 다량으로 제작되고 소비된 점 등을 고려하면 창원 남산 취락이 당시 취락 공동체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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