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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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海黑白-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월춘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대천동에 있는 클래식 음악 다방 겸 문화 예술 사랑방.
[개설]
1955년 ‘칼멘 다방’을 서양화가 유택렬이 인수하여 까치의 이미지에서 따온 ‘흑백다방’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시작되어 진해의 문화예술 무대가 되기도 하고, 문화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곳이다. 클래식 음악 감상을 주로 해왔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다방을 폐업하고 지금은 ‘시민 문화 공간 흑백’으로 운영되고 있다. 2021년 11월 4일 국가등록문화재 제820-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흑백 다방 가는 길]
진해에는 로터리가 세 개 있다. 하나는 해군 작전 사령부 입구에 있는 북원 로터리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동상은 1953년 4월 13일 제막되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해군 공창에서 주물을 부어 제작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옛 진해 우체국과 경찰서가 있던 곳, 지금은 우리 은행과 농협이 있는 중원 로터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해군 사관 학교 입구에 있는 남원 로터리이다. 이곳에는 왜적과 싸움을 맹세한 이순신 장군의 시[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백범 김구 선생의 글씨로 새긴 비석이 있다. 8·15 해방 직후 김구가 진해를 방문해서 지금은 없어진 진해 역전의 태화 여관에 유할 때 일필휘지한 것을 청년 단체에서 돌에 새겼다고 한다.
세 개의 로터리 중 중원 로터리가 가장 커서 진해 시내의 중심 역할을 했다. 지금은 진해의 중심이 동부권으로 옮겨가 석동과 자은동 일대가 시내가 되었지만. 예전의 중심지였던 서부권은 상권이 퇴색해 밤 아홉 시면 벌써 상가의 불이 꺼진다. 많은 사람들이 서부권을 살릴 방안을 연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급기야 통합 창원시가 되면서 구 육대 자리에 시청사를 포기하면서까지 프로 야구 NC 다이노스의 홈구장을 만들어 진해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서두에 늘어놓는 것은 진해 문화의 등대라 불리는 흑백다방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중원 로터리 우리 은행을 오른쪽으로 돌면 건너편에 일본식 목조 건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양 옆의 건물도 같은 일본식 목조 건물이었지만 신축하거나 리모델링을 해서 말끔한 현대식 건물로 다시 태어났다.
다소 낡은 듯한 하얀색 벽면의 2층 건물, 창문 한 편을 초록색으로 덮은 담쟁이순과 ‘Since 1955 흑백’이란 글귀가 세월을 느끼게 한다. 이름처럼 흰색과 검은색의 톤이 돋보이는 이중문을 열고 들어간다. 입구에 돌장승이나 돌절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벽면에 가득한 그림들, 뮤직 박스 안에는 수 백 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들, 아직도 흑백 고유의 커피 향은 은은하고 분위기는 여여한데 무대에는 피아노가 놓였다. 뮤직 박스 위에는 다섯 개의 탈도자기가 걸려 있다. 통영의 피카소, 색채의 마술사 등으로 불리며 통영의 쪽빛 바다를 닮았다는 전혁림[1916~2010] 화백이 배고픈 젊은 시절 흑백다방에 출입하면서 특이한 채색을 한 탈을 제작했다는 이야기는 아는 사람만 안다. 원래 여섯 개였는데 하나는 깨져버렸다고.
두 대의 피아노. 유택렬 화백의 둘째 딸이자 피아니스트인 유경아가 목숨만큼 아끼는 피아노이다. 그래서 유경아는 ‘피아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되었다. 약간은 어두컴컴한 분위기,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이 흐른다. 저쪽 자리쯤에 주인이었던 유택렬 화백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을 것만 같다. 부인이자 고미술품 수집가였던 이경승 여사가 커피를 끓여 내오고. 그래서 흑백의 다탁은 절구통이나 말 구유, 커다란 도자기 따위에 유리판을 깐 것이 많았다. 다방 곳곳에 그 많던 고미술품들이 하나둘 없어져 지금은 몇 개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하긴 주인이 없으니 어쩌랴 싶지만 안타깝다.
흑백다방. 어떤 형태로든 진해와 문화 예술적 고리를 하나라도 가진 이라면 그들의 하드웨어 디렉토리에 흑백다방이라는 추억과 열정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해군 사관 생도 시절을 보낸 이라면 대학이 없는 진해에서 흑백다방의 커피와 음악을 추억하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다.
[서양화가 유택렬과 흑백 다방]
흑백다방을 들먹이려면 유택렬 화백부터 들어가야 옳다 싶다. 유택렬 화백이 1924년 한반도의 북쪽 끝 언저리인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으면서도 한반도의 남쪽 끝인 진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일제 말기 강제 징집으로 진해 해군 공창(工廠)에 근무하면서 남쪽 바다와 아름다운 해양 도시 진해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해방과 더불어 고향인 북청으로 돌아갔으나, 1951년 1·4 후퇴 때 흥남 부두에서 거제도로 철수, 부산 등지로 전전하다가 진해중·충무중·진해 여중·진해고에 미술 교사로 근무하면서 진해에 정착하게 된다. 예술에 있어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진해 지역에 유택렬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역사적 흐름과 관련이 있었다.
유택렬 화백은 사촌형인 일본 동경 미술 학교 출신의 유강렬[일본 동경 미술 학교 출신. 홍익 대학교 교수로 공예학과 창설자이자 산업 미술 대학원장 역임]과 각별한 사이로 그를 매개로 또는 직접 이중섭·강소천[아동 문학]·강창원·최순우·박고석·정규·김훈·장욱진 등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1955년 친구인 작곡가 이병걸이 운영하던 진해 칼멘 다방을 인수하여 ‘흑백’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흑백은 반가운 손님을 매개한다는 함의가 있는 까치의 색에서 따 왔다고 한다], 그 2층에 미술 연구소를 열면서 명실상부한 진해 예술의 본거지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10여 년 동안 진해 군항제 포스터를 직접 그렸고, 진해를 찾아오는 예술인들을 도맡아 접대하는가 하면 전혁림·김종식·이석우·송혜수·조동벽·염태진·나건파·강신석·추연근·임호·문신·이림·최운 등 화가와 교유하였으며, 박생광·하인두·정문현·진의장·추연근·류시원 등과는 영토회전을 가진 바가 있다. 청마 유치환, 김춘수, 화인 김수돈, 월초 정진업, 파성 설창수, 백청 황선하 등을 포함한 이 지방의 문인들과도 깊이 교유하였고, 1988년에는 권경자·류시원·박덕규·박종갑·성용환·이달우·정도화·정문현·황원철 등과 경상남도 현대 작가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유택렬이란 이름 석 자를 이 지역에서 각인시켜 놓은 사실에 대한 논증도 없이 6·25 전란기 이후 반세기를 훌쩍 보내어 온 지금 그저 진해 사람, 진해 예술의 대부, 군항제 예술제 행사의 중심 인물이라는 막연한 잔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만치 진해 지역에서 유택렬의 위용과 자태는 어느 지역에서 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화면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앵폴멜적인 효과를 바탕으로 하여 동양 정신에서 연유한 샤머니즘 이미지가 강하게 풍겨 흐른다. 어찌 보면 흑백 톤이 화면 전체에 깔리면서 「부적」 시리즈는 해학적 이미지로 표출되고 있다.
유택렬은 함경도 태생답게 북방권 문화의 고구려 기상을 보유하고 있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외모의 풍모도 그러하거니와 성격 형성도 북방 권역의 강인한 체질 현상이 보여진다.” [황원철, 전 경남 도립 미술관장]
진해의 대표적 서양화가, 6·25 전쟁 때 월남하여 많은 예술인들과 흑백다방에서 예술 담론을 펼치기도 하셨고, 진해 중고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후학들을 키운 한국적 서양화가. 고인돌·부적·단청·떡살·민화에서 우리 고유의 멋을 재발견해 내는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해 온 인물. 서양식 비구상으로 표현하였지만 내용은 한국의 영혼과 사상이라는 화단(畵壇)의 평가를 받아온 유택렬 화백.
1999년 작고한 이래 개인 추모전[마산 대우 백화점 갤러리]과 개관전[경남 도립 미술관] 그리고 경남 작고 작가 7인 추모전[마산 동서 화랑]을 통해 그의 인생과 예술을 철저히 분석하고 조명하였으며, 박석원·김미윤·윤진섭 등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진해 문화의 아이콘 흑백다방]
4월에
4월에
진해로 오시오
작은 새 마냥
훨훨
마진 고개를 넘어
당신의
지순한 사랑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내 고장 진해로 오시오
[황선하의 시 「4월에」 중에서]
생전에 황선하 시인은 흑백다방에서 커피를 마신 후 분분히 떨어지는 벚꽃잎 아래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나직하게 이 시를 읊조렸다. 요즘은 여러 곳에서 수많은 벚꽃을 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벚꽃 하면 진해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올해로 51년이 되는 군항제의 명성 또한 그러하다.
예년보다 따뜻한 날씨 탓에 2013년은 군항제를 열기도 전에 서둘러 꽃이 피었지만, 확실히 진해의 사월은 벚꽃을 빼고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질 않는가 보다. 그래서 황선하 시인은 진해의 벚꽃을 ‘당신의 지순한 사랑’이라 명명했는지도 모른다. 연분홍 꽃잎들에서 아름다움과 아련한 추억들을 읽어낸 것은 아닐까. 아무도 없는 초저녁의 공간을 딸 유경아가 지키고 있었다. 나는 흑백과 인연이 많은 이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유경아는 그런 인연들을 다시 끌어안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 다방의 그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탁자를 비롯한 집기가 아닌가 한다. 전쟁이 갓 끝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인데 이 다방은 주인의 탁월한 안목이 아니면 생각도 못할 일을 벌여놓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던 농촌 구석에나 널려있던 골동품격 생활 용품을, 현대 실생활에 과감히 도입하여 응용하는 방법을 구사한 것은 가히 창조적인 발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소나 말의 여물통으로 사용하던 나무 구유, 나무 혹은 돌로 된 절구통, 널찍한 나무떡판 따위를 탁자로 사용하여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그 물건들을 깨끗이 닦거나 기름을 칠하여서는, 절구통에는 유리를 깔아 훌륭한 탁자로 탈바꿈시키고 떡판은 원형 재질 그대로 탁자가 되게 만든 것이다. 이런 하찮은 생활 용구를 수집하여 탁자 용도로 치장하였으니 유택렬 화백이 아니면 창안할 수 없는 획기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농촌 환경이 차츰 개방되고 근대화되면서 농가의 실용적인 용도로 활용되던 이 전래의 도구들은 어느 사이 슬금슬금 밀려나 어떤 농가이건 처치곤란의 퇴물 취급을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런 물건을 유 화백이 수집하여 싣고 가는 모습을 보고 농촌 사람들은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모르긴 해도 지금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찻집은 진해의 ‘흑백다방’이 전국 최초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이 다방에 한 번이라도 드나든 사람들은 자기 집이나 동네에 널려있던 하찮게 여겨지던 이들 물건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이때부터 바짝 농촌의 퇴물 생활 용품의 골동품 취급 시대로 전환되는 계기를 맞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골동품 탁자에다 선명한 회화적 이미지의 실내 장식은 당시만 해도 갤러리는커녕 화랑의 개념에도 미처 미개 수준이던 지역 여건에서 수준 높은 현대 회화가 벽에 걸리고 거기에 겨우 유행가 가락이나 흥얼거리던 분위기에 교과서에서나 들어 알던 이름의 모차르트니 베토벤이니 슈베르트니 차이콥스키니 하는 클래식 음악을 눈을 지그시 감고 감상하는 첨단적 공간을 갖게 되었으니, 이 다방에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문화인다운 자긍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짐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다방의 등장은 이런 정서에 굶주린 젊은이들과 진해에 근무처를 둔 군인들이 환장을 하고 모여든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평일에도 군인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지만 토요일 오후만 되면 앉을 자리가 없었다. 외출·외박을 나와도 들르고 휴가를 오갈 때도 당연히 들르는 문화 공간이 된 것이다.”
[오하룡, 「진해 흑백다방의 추억」에서]
[피아니스트 유경아와 흑백]
예술적 공간이라곤 없었던 시절부터 지금껏 음악 감상회, 미술 전시회, 연주회, 시 낭송회, 연극 공연 등 진해의 문화 사랑방 역할을 해온 흑백다방, 더 이상 흑백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진해의 특별한 보통 명사가 되었다. 116㎡의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 진해 유일의 클래식 다방, 오래된 목조 가옥에 흑과 백의 심플한 채색 거기다가 2층엔 유택렬 화백의 화실이 있었다. 지금도 유경아가 사용하면서 아버지의 흔적과 체취를 그대로 두고 있다.
인근 도시의 예술인들은 누구나 진해에 들르면 커피 한 잔과 클래식 음악을 즐기면서 흑백만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확실히 흑백은 음악과 미술과 연극과 시가 하나가 되던 공간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서른 번쯤 진행되었던 ‘진해와 진해 사람들의 시’ 행사 때의 그 열정도 잊히지 않는다. 부산·진주·창원·마산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문인들을 초청하고, 황선하·방창갑·배기현·강종칠·김정환·정일근·정이경·김승강 시인들의 낭송 모습과 진해 예총 식구들, 시민들, 그때 정말 우리는 행복했다. 모든 게 열악했던 진해의 문화지킴이었던 흑백다방에서 우리는 삶의 힘과 문화적 자양분을 얻었던 것이다.
유택렬 화백이 쥐고 있던 흑백다방의 큰 줄과 문짝 하나를 딸 유경아가 받아 쥐고 ‘흑백’의 이름과 가치를 다독이면서 이어가고자 했지만 지금은 진해에 흑백다방이 없다.
사실 유택렬 화백 내외가 모두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피아니스트인 유경아가 진해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부모에 그 딸이랄까. 그는 진해에 남았다. 그것도 그냥 남은 게 아니라 부모님의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다시금 흑백다방의 부활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해에서 흑백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흑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껴안고, 떠나간 문인과 화가 등 예술가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생각하는 그는 여전히 당당하고 밝아보였다. 그랬던 그가 왜 흑백다방의 간판을 내리고 말았을까. 운영상의 어려움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게 이해되지 않는다. ‘흑백’은 결코 돈으로 이야기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백’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다만 잠시 휴식기에 들어간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얼마 안 가 다시 흑백다방의 간판을 달고 커피향 그윽하게 문화의 꽃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간판을 ‘시민 문화 공간 흑백’으로 바꿔 달았지만 여전히 진해 문화의 마당이 되고 있고, 시민은 물론 흑백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얼마 전에는 영화 「화차」를 촬영하기도 했고, 군항제가 열리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커피를 마시는 곳, 반백의 노 신사가 부인과 함께 들러 그때를 추억하기도 하며,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 마음을 추스르기도 하는 ‘흑백’을 어찌 사라졌다 하겠는가. 진해의 문화 예술인들 치고 흑백의 자양분을 먹지 않고 자란 이가 있겠는가. 자타가 공인하는 흑백의 시인 정일근의 시 한 편을 읽는다.
오래된 시집을 읽다, 누군가 그어준 붉은 밑줄을 만나
그대도 함께 가슴 뜨거워진다면
흑백 다방, 스무 살 내 상처의 비망록에 밑줄 그어진
그곳도 그러하리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를 들을 때마다
4악장이 끝나기도 전에
쿵쿵쿵 쿵, 운명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수갑을 차고 유폐될 것 같았던
불온한 스무 살을 나는 살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는 밀항선을 타거나
희망봉을 돌아가는 배의 삼등 갑판원을 꿈꾸었던 날들이 내게 있었으니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여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 로터리에서
갈 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을 터트려
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곳,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 다방이여
memento mori,
세상의 화려한 빛들도 영원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라지느니
영혼의 그릇에 너는 무슨 색깔과 향기를 담으려 하느냐,
나를 위무하며 가르쳤으니
그 자리 그 색깔 그 향기로
사진첩의 속의 흑백 사진처럼 오래도록 남아있는
since 1955 흑백 다방,
진해시 대천동 2번지
[정일근의 시 「흑백 다방」 전문.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정일근도 정이경도 김승강도 필자도 황선하·배기현·고영조·방창갑·오하룡 시인들의 뒤를 이어 고전적인 커피 맛을 알았고, 문학과 예술의 깊고 그윽한 길을 걷기 시작했던 흑백다방.
진해 문화의 등대 흑백다방을 소재로 한 시와 수필은 한두 편이 아니다. 김승강·고영조·오하룡·정이경·최근봉·이상개·박문수·이성복·이수익·배기현·방창갑·황선하 등. 분명 진해의 흑백다방은 창원 아니 한국 문화의 아이콘이 되고도 남는다.
이제는 진해도 많이 변했다. 1993년 시민 회관이 생기고, 시내 곳곳에 문화 예술 행사를 열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간판을 내리면서, 우리들의 ‘흑백’은 문화 예술인들의 전시 행사 공간의 역할과 문화 사랑방 역할을 충분히 해오지 못했다.
유경아가 커피를 내린다. 직접 볶아서 갈아낸 원두커피의 향은 여전히 좋다. 삐걱거리며 이층 목조 계단을 밟고 노 화백이 내려오는 환청에 빠진다. 그의 그림에 눈이 간다. 몇 십 년을 봐 왔지만 그의 그림 세계는 간단하지 않다.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는 시대이다. 사람도 그렇고 과학 기술이며 사람 살이의 문화까지도 그렇다. 빠르게 변하는 것이 미덕으로 칭송 받는 시대라지만 모두가 그래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빠름이 있다면 느림도 있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느림의 미학을 느끼고 싶다. 조화의 삶을 꿈꾸고 싶다. 흑과 백의 단순한 조화를, 느림의 미학을 말없이 보여주던 아름다운 곳, 흑백다방의 커피 맛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흑백다방의 역사를 영원히 이어가고 싶다.
흑백다방이 없는 지금의 진해는 전혀 진해 같지 않다. 허전한 마음을 다독이려고 속천 해안 도로를 따라 걷지만, 어떤 것도 그 자리를 채워주지 못한다. 쓸쓸함과 허전함과 안타까움을 넘어 정말 슬프다.
유경아, 그를 믿고 싶다. 왜냐하면 그녀야말로 흑백다방의 과거요 현재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