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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노동자 쟁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37
한자 東洋製絲株式會社鎭海工場勞動者爭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 -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준공
발단 시기/일시 1932년 11월 20일 -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노동자 총파업 모의
전개 시기/일시 1932년 11월 21일 -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노동자 쟁의 주동 인물 9명 진해 경찰서에 연행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3년 1월 4일연표보기 - 요구 조건을 내걸고 쟁의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33년 1월 4일 -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노동자 쟁의 진해 경찰서 강제 진압과 연행, 공장 휴업 결정
전개 시기/일시 1933년 1월 10일 -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노동자 공장에서의 항쟁 계획이 경찰의 제지로 실패
전개 시기/일시 1933년 1월 14일 -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노동자 파업단에게 복업 설득
전개 시기/일시 1933년 1월 17일 -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여공들의 공장 정문 앞 시위, 진해 경찰 강제 연행과 해산
전개 시기/일시 1933년 1월 17일 -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여공들 임금 지불
종결 시기/일시 1933년 2월 9일연표보기 - 주동자 해고과 검거
성격 노동 쟁의
관련 인물/단체 어삼조|김말숙|김차점|이정수|김복리|변분옥

[정의]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일어난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의 노동자 쟁의.

[개설]

일제는 약탈 정책에 따라 양잠을 장려하고 누에 실을 뽑는 제사 공장 설립을 추진하였다. 1930년에 준공된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은 그 중 하나로 한국인 공원들이 많았는데 노동 환경과 처우가 매우 열악했다. 이에 저항하여 남녀 공원들이 노동 쟁의를 일으켰다.

[경과]

진해 공장 설립이 동양 주식회사 진해 공장으로 결정된 것은 1929년이었다. 1929년 4월 24일 제1기 공장 건설지 7,000 평에 대하여 공사를 착수했다. 이 공장은 경화동 국도[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중앙로] 남쪽 해안 쪽에 위치한 100,000평이 넘는 부지 중의 일부였다. 1930년에 공장이 준공되고 조업이 시작되었다.

관리 사무소는 주로 일본인들이 종사했으며, 생산직에는 한 공장에 120명이 넘는 한국인 남녀 공원들이 조업을 하고 있어 한국인 종업원은 400여 명에 이르렀다. 여공들은 대부분 가정이 곤란하여 취학을 하지 못한 13세에서 18세까지의 처녀들로 350명 정도였다.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은 너무 열악했다. 이들은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12시간을 근무하는데도 일본인보다 훨씬 낮은 노임을 받았으며, 한국 여공들은 최하 30원에서 최고 60원 사이의 임금을 받았지만, 작업에 조금만 잘못된 점이 있으면 당일 임금보다 많은 벌금을 내기도 하였다. 일본인 가운데에는 연약한 여공들을 구타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불공정한 처우에 불만을 가진 한국인 남녀 노동자들은 1932년 11월 20일 밤과 24일 밤에 20여 명이 비밀리에 모여 다음 달인 1932년 12월 10일에 임금 인상, 기숙사의 난방 개선, 기숙사의 점등 시간 연장, 기숙사의 외출 자유, 기숙사의 식사 개선, 근무 시간 단축, 차별 대우 철폐, 여공의 인권 존중 등의 요구를 하고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모의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모의자 중 한 사람이 회사 간부에게 밀고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모의한 다음 날인 1932년 11월 21일 저녁 8시경 기숙사 내에서 진해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어정봉(魚珵奉)[1914~1984] 등 주동 인물 9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모의자들이 연행된 다음 날인 1932년 11월 22일에 공장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작업을 마친 여공들은 기숙사로 돌아가서 변분옥(卞粉玉), 조진찬(趙診讚), 이말이(李末伊) 등이 중심이 되어 다시 모의하였다. 하지만 여공들만으로는 추진이 어려워, 9일 만에 풀려난 남자 공원들과 다시 합류하여 파업 투쟁 비밀회의를 거듭하였다. 1933년 신정 연휴를 틈타 1월 4일 새벽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결행하기로 했다. 1933년 1월 4일 오전 6시 반쯤 관리 사무실 앞 중앙 복도에 도열하여 남자 공원 어삼조, 여자 공원 김말숙이 대표로 나서서 요구 조건을 하나씩 외쳤다. “1.노동 시간을 10시간으로 단축하라. 2.임금은 최저 25전으로 올려라. 3.음식은 교부(敎婦)나 감독과 차별을 하지 마라. 4.벌금제를 철폐하라. 5.공장 안에서 일어난 부상과 질병은 공장에서 부담하여 치료하라. 6.구타를 폐지하라. 7.희생자를 내지 마라. 8.현 업장 강모를 축출하라. 9.전기를 자유롭게 쓰게 하라.”는 것이었다.

새해 작업이 시작되는 날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감지하지 못했던 회사는 뒤늦게 경찰에 연락했고 3대의 트럭에 경관들이 나눠 타고 공장 정문으로 출동했다. 하지만 여공들의 강력한 기세 때문에 경찰들에 의한 제압이 어렵게 되자 닥치는 대로 여공들을 진해 경찰서로 연행했다. 그리고 배후 조종 혐의로 경화동에서 정해인을, 웅천에서 조동규를 진해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한편 공장장은 파업 여공들의 요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휴업을 결정하자, 여공들은 연행된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며 진해 경찰서로 몰려갔다. 경찰은 여공들의 단호한 태도에 검거된 공원 전원을 석방하고 파업 여공 대표와 절충을 하여 9가지 요구 조건 중에서 1.임금 인상, 2.근무 시간 단축, 3.대우 개선, 4.식단 개선, 5.해고 절대 반대 등의 다섯 가지만 요구하기로 합의하여 공장 측과의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공장 측은 이러한 경찰의 중재를 거절했다. 이에 파업단에서는 복업을 하기로 한 1933년 1월 10일에 공장으로 들어가 항쟁할 계획을 세우고 각지에 연락을 했다. 경찰은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고 1월 10일 파업단의 회사 진입을 막았다.

1933년 1월 14일에는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보내어 무조건 복업할 것을 설득했다. 파업단은 회사의 간교한 술책을 막아내고 지구전을 벌이기 위하여 지방 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쌀, 보리를 되는 대로 모아서 경화동에 거주하는 여공들을 중심으로 40~60명 쯤 모여 비밀회의를 했다.

1933년 1월 17일 50여 명의 여공들이 공장 정문 앞에서 공장장과의 면회를 요구했다. 경찰이 해산을 요구했으나, 두 시간 넘게 시위를 하였다. 이에 경찰은 자동차를 동원하여 전원 연행하여 타 지방 여공들은 돌려보내고, 진해 지역 여공들은 오후 5시경에 해산하였다. 연행된 여공들 가운데 시위 주모자로 이정수, 김복리, 이분이, 김복남 등을 계류하고 선동 혐의로 조동규, 배소갑, 배호영, 배군주, 주병택, 이기정 등을 체포했다.

이러한 경찰의 강력한 조치에 힘입은 회사 측은 1933년 1월 17일경부터 회사 직원들을 여공들의 가정에 보내 종전대로 임금을 지불했고 1933년 2월 10일을 작업 시작일로 결정하고 새로이 여공 모집을 했다. 그리고 회사 측은 파업 주동자를 해고하기로 결정하였다. 경찰에서는 1933년 1월 30일 변분옥, 김차점을 또 검거하고 1933년 2월 4일에는 남공 최두도, 김영수를 검거하였다. 이어 1933년 2월 9일에는 이정수, 김복리 등 9명의 파업 여공을 검거하고, 동시에 남공 어정봉 등 4명을 검거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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