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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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洞書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원규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0년 10월 14일 - 옥동서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9-2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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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옥동서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6년 1월 24일 - 옥동서첩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부터 기증 받아 보관 |
현 소장처 | 경남 대학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 |
출토|발견지 |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 - 山口県山口市 桜畠 3-2-1 |
성격 | 필사본 |
작가 | 이서 |
소유자 | 한마 학원 |
관리자 | 경남 대학교 박물관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경남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옥동(玉洞) 이서(李漵)[1662~1723]의 유묵첩.
[개설]
옥동서첩(玉洞書帖)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초대 통감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재임 기간에 수집했던 자료로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山口縣立大學] 도서관 데라우치 문고[寺內文庫]에 소장되어 있었다. 경남 대학교는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부터 1996년 98종 136점의 조선 관계 자료를 기증 받아 보관하고 있는데 옥동서첩도 그 중 1종이다. 2010년 10월 14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9-2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옥동서첩의 크기는 38㎝×24㎝이며 전체 분량은 22쪽이다. 각 면에는 2자씩 내지는 한 글자씩 쓰여 있으며 맨 끝 두 면에는 초서가 쓰여 있다. 보관 상태는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옥동서첩은 이서가 송나라 주희(朱熹)[1130~1200]가 지은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 가운데서 이천성생(伊川先生) 정이(程頤)[1033~1107]를 두고 지은 글을 행서로 쓴 글이며 이서의 독특한 서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서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징지(徵之)이며 옥금산인(玉琴散人)이라고도 불렀다. 아버지는 대사헌을 역임한 이하진(李夏鎭)[1628~1682]이고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그의 아우이다. 벼슬은 찰방(察訪)에 그쳤으나, 글씨를 잘 써서 일가(一家)[독자적인 경지나 체계를 이룬 상태]를 이루었다. 이서는 “글씨는 심법을 궁구해야지 자획(字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글씨의 외양만 본뜨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심획(心劃)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이서는 외형적인 균제미(均齊美)에만 치중하는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와 관청의 서사정식(書寫程式)으로 흐른 석봉체(石峰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때문에 그는 진체(晉體)의 필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창의적인 필법에 몰두하였는데,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은 “동국(東國)의 진체(眞體)는 옥동에서 비롯되었다.[『성재집(性齋集)』에 수록]”고 하였다. 조선만의 고유한 서체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동국진체(東國眞體)는 이서로부터 시작하여 제자인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을 거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옥동서첩은 글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필결(筆訣)」이라는 서예 이론과 비평서를 남긴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옥동의 「필결」은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해서 서화를 말기(末技)로 간주한 당시 도학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매우 혁신적인 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필결」 저작을 통해 서예를 ‘역리(易理)’와 등치시킴으로써 서예를 도학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받고 있다.